삶의 양식/CoramDeo_호세아

[코람데오] 08월19일(토) - 호세아 4장 11 - 19절 '이스라엘의 죄상'

TR.H.Lee 2017. 8. 19. 23:51

 

 

 

 

 

말씀 호세아 4장 11-19절
제목 이스라엘의 죄상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내 백성이 나무를 향하여 묻고 그 막대기는 저희에게 고하나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그 하나님의 수하를 음란하듯 떠났음이니라. 저희가 산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아름다움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이 행음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을 행하는 도다.’(호 4:11~13, 개역한글)

이스라엘은 이미 음행과 포도주에 마음을 빼앗겼다.


본문에서 말하는 ‘음행’은 ‘매춘’을 뜻한다.(‘harlotry/whoredom’ - NASB/KJV) 이 한 줄을 통해 당시 매춘이 얼마나 성행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본다면 -인터넷 검색- 단순한 성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행태가 얼마나 타락되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음행의 시작은 다른 만족함을 찾는데서 시작이 된다.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면 인간의 죄 된 욕망과 그 죄의 본질을 가르치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대면하게 된다.


‘너는 네 딸을 창녀로 내놓아서, 그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딸을 창녀로 내놓으면, 이 땅은 온통 음란한 풍습에 젖고, 망측한 짓들이 온 땅에 가득하게 될 것이다.’ (레 19:29, 표준새번역)


‘네 샘이 복된 줄 알고, 네가 젊어서 맞은 아내와 더불어 즐거워하여라. 아내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아름다운 암노루, 그의 품을 언제나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그의 사랑을 언제나 사모하여라.’ (잠 5:18-19, 표준새번역)


작금의 시대에 민감한 단어가 ‘간통’이다. 이미 간통죄도 사생활 침해 논란과 함께 개인의 성 선택권의 자유를 들어 폐지가 되었다. 간통을 통해 나타나는 가정 혼란과 파괴에 대해 그간 법이 보호를 해주었다면 폐지 이후 더 이상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당사자가 풀어야 한다. 또 하나 ‘매춘’이다. 정부는 매춘에 대해 강력하게 규제를 나서고 있지만 개인의 자유와 직업의 보장을 들어 이 매춘 또한 법의 규제를 벗어나리라는 전망이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와 보장을 앞세우게 되면 법은 형평성을 잃게 되고 법을 집행하는 기관은 집단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된다. 그리고 법은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옳고 그름의 문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으로 움직이게 되며, 옳고 그름의 문제는 절대적 진리가 아닌 대다수의 문제 또는 집단행동의 문제가 되었다. 이미 사회는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교회도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야할 성경을 임의대로 해석하고 만들고 있다.(삿 21:25)


성경은 음행(매춘)의 책임이 가정(家庭)에 있다고 시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음행의 시작은 가정이기 때문이다. 한 가정에서 자신들의 딸들을 음행으로 몰아갔고, 그것을 보기 좋게 여기는 가정들이 하나 둘씩 운집하여 결국 사회는 매춘화가 되어간다. 또한 음행은 자기 아내를 만족하지 않는 남성의 보편적인 죄악을 고발한다. 매춘과 간통은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개인의 욕심이며 탐욕의 근원이다.


‘포도주는 사람을 거만하게 만들고, 독한 술은 사람을 소란스럽게 만든다. 이것에 빠지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혜롭지 않다.’ (잠 20:1, 표준새번역)


술은 사람을 거만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소란스럽게 만든다. 술에 빠진 사람은 통제력을 잃게 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과를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히려 법은 술 취한 사람을 ‘심신미약자’로 분류하여 그들을 보호한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에게 상해(傷害)를 입히거나 죽이게 되면(殺人), 심신미약상태이므로 법의 보호를 받는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다. 술은 사람의 마음을 거만하게 만들며 소란스럽게 한다는 것에 대해 이견(異見)이 없다.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치여 죽여도, 초범(初犯)이고, 뉘우치는 행동을 하면 법은 집행유예(執行猶豫)로 풀어준다. 음주상태에서의 행동들을 법이 인정해주는 셈이다. 그 과정에 피해자가 되어버린 가족은 모든 무게를 안고 가야한다. 보험도 음주 중 사고에 적용이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술을 권하고 즐긴다. 오히려 선진국이라 부르는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을 미국과 일본, 유럽에서는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나라에서는 음주로 인한 상해, 살인 등에 대해서 엄격하게 처벌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금주(禁酒)를 가르치고 금연(禁煙)을 이야기하면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종자’취급을 하면서 비웃는다. 분명 교회는 선(善)을 가르치고 그것을 행하도록 격려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오히려 교회는 주변과 사회 그리고 교인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 그것이 과연 교회일까?

성경은 이미 단언하고 있다. ‘음행’과 ‘음주’가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다. 아무리 절주를 하고 줄일지라도 분명한 것은 분명한 것이다. 아닌 것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더 형평성이 없으며 개인과 사회를 농락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은 교회를 향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장로도, 집사도 술 마시더라. 그러니까 너도 마셔. 괜찮아.’, 그리고 사고가 나면 교회를 욕하고 교인을 욕한다. ‘도대체가 교회에서 뭘 가르친 거지?’


이미 이스라엘은 음행과 포도주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 결과 그들의 가정과 사회는 파괴되었고 정의는 웃음거리가 되었다. 온전한 정신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면 죄를 찾지 못하게 되니까 아마도 그들은 더욱 더 술과 음행에 젖어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했었는지도 모른다. 술과 음란에 젖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하나님을 찾고 있었다. -이미 마음속에 새긴 하나님을 찾고 있었다.- 나무에게 묻고 막대기에게 답을 구하는 이런 상식 없는 행동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산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에서 분향을 하고 아름드리나무 아래서 거리낌 없이 음란을 행하는 이 모습을 어떻게 봐야할까?


‘너희의 딸들이 음행을 하고, 너희의 며느리들이 간음을 한다.’ (호 4:13 下, 표준새번역)


학문적 논리는 항상 그렇게 시작이 된다. 분명 성경이 죄라고 가르친 것을 논리는 그것을 한 번에 뒤집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것이 죄가 맞아. 그렇지만 상황에 대해 생각을 해보자고’, ‘분명 잘못한 거지. 하지만...’, ‘보편적으로 보면 잘못이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는 잘못으로 보기 어렵겠지?’ 라며 죄에 대해 둔감하도록 논리를 펼친다. 이런 입장을 살펴보면 처음 절대적인 진리를 인정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그 진리를 흔들어버리고 진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상황이 중요하도록 만들어낸다. 철학의 사조(思潮)를 살펴보면 명제(命題)는 매번 뒤 따라오는 사조에 의해 바뀌게 된다. 즉, 어떤 논리와 논점으로 다가오느냐에 따라 명제는 바뀌는데, 논리는 진리가 아님을 주목해야 한다.


중세시대 로마 카톨릭의 영향을 받은 유럽의 화가들은 음란한 모습이나 참람(僭濫)한 것을 그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성모 마리아가 아기예수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을 상상하여 화폭으로 담았다. 그림을 보면 한 여인이 유두(乳頭)를 내 놓으면서 아기에게 모유(母乳)를 먹이는데 이 그림을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라는 정당화함으로 음란의 경계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들의 생각과 해서는 안 될 것에 거룩함을 끼워 넣으면 더 이상 죄가 아닌 것이다. 누드화의 시작은 인간의 죄 된 욕망을 거룩함으로 가려놓은 것이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던지고 말았다.-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전 7:29, 개역한글)



사람의 몸이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는 이견(異見)이 없지만,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은 이미 죄성인 까닭에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보면서 음란과 참람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아름다움을 좇는 인간의 본능을 사단은 역이용한 것이다.

13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스라엘은 아름드리나무의 그들이 아름답다고 표현하면서 그들의 본질적인 죄의 모습은 감추고 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명령을 어긴 것이 아니라 그것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곳에 분향을 하고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초점을 맞춘다. 실상은 그것을 통해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한 것이다. 새긴 우상을 만들고, 하나님 대신 자연을 섬기며, 음행을 일삼는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포기한 것이다.



‘너희 딸들이 행음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 (호 4:14, 개역한글)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딸들과 며느리들의 성적인 타락에 대해 벌을 내리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미루시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타 번역서로 14절을 잘 읽어보면 의미심장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너희 남자들도 창녀들과 함께 음행을 하고, 창녀들과 함께 희생 제사를 드리는데, 너희 딸들이 음행을 한다고 벌하겠느냐?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을 한다고 벌하겠느냐?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한다.’ (호 4:14, 표준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 남자를 지으시고 여자를 지으신 목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남자를 먼저 지으신 것은 남자가 우월해서가 아니다. 먼저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의무와 책임이 크다는 것이다. 딸들과 며느리들의 성적 타락 현장을 고발함에 있어서 이 책임은 그것을 방임하고 허용한 남자들에게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남자는(男子, 父) 가정을 지킬 책임을 지고 있다.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고, 가족이 위험에 처할 때 제일 앞에서 막아야 하며, 가족을 책임지는 사명이 남자에게 있었다. 가장의 책무를 갖는 남자가 그것을 포기했다. 이유를 보자면 그들이 먼저 죄로 달려갔고 그 죄악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14절은 남자가 먼저 죄를 묵인한 것과 허용한 것 그리고 그것에 타락된 생활을 그 자녀들과 며느리들에게도 요구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호세아 4장과 5장을 읽어보라. 이는 심판을 포기하시는 것이 아님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만 한다면, ‘평안하다, 평안하다’ 라는 말과 위로로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한다면 우리는 망하게 될 것이다.(‘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한다’ - 14절 표준새번역)


‘그러므로 백성이나 제사장이 똑같이 심판을 받을 것이다. 내가 그 행실대로 벌하고, 한 일을 따라서 갚을 것이니’ (호 4:9, 표준새번역)


‘너희 제사장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 이스라엘 백성아, 똑똑히 들어라! 너희 왕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너희가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중략)’ (호 5:1, 표준새번역)


‘이스라엘의 딸은 창녀가 될 수 없다. 또 이스라엘의 아들들도 남창이 될 수 없다.’ (신 23:17, 표준새번역)


‘내가 이스라엘을 처음 만났을 때에, 광야에서 만난 포도송이 같았다. 내가 너희 조상을 처음 보았을 때에, 제 철에 막 익은 무화과의 첫 열매를 보는 듯하였다. 그러나 바알브올에 이르자, 그들은 거기에서 그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바치고, 우상을 좋아하다가 우상처럼 추악해지고 말았다.’ (호 9:10, 표준새번역)



“이스라엘아 너는 행음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찌어다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 같이 저희를 먹이시겠느냐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 저희가 마시기를 다 하고는 행음하기를 마지아니하며 그 방백들은 수치를 기뻐하느니라 바람이 그 날개로 저를 쌌나니 저희가 그 제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리라” (호 4:15~19, 개역한글)

호세아서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묵시적 말씀이며 미래에 되어질 일을 보여주는 예언서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탄식하시면서 유다는 죄를 짓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당시 유다를 통치하고 있던 히스기야왕과 그의 백성들을 향한 경고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나서 약 134년 후에 유다가 멸망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호세아를 마지막 왕으로 멸망함-


‘이 백성의 온갖 죄악은 길갈에서 시작된다. 내가 그들을 미워하기 시작한 것도 길갈에서다. 하는 짓이 악하니, 그들을 나의 집에서 쫓아내겠다. 다시는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이라는 것들도 모조리 나를 거슬렀다.’ (호 9:15, 표준새번역)


‘길르앗이 악하냐? 그렇다. 그들은 거짓되다. 길갈에서는 사람들이 황소를 잡아서 제물로 바치고 있다. 그들의 제단이 들녘의 돌더미처럼 많다.’ (호 12:11, 표준새번역)


‘사마리아 주민은 벳아웬의 금송아지를 잃고 두려워하고, 그 우상을 잃고 슬퍼할 것이다. 그것을 즐겨서 섬긴 1)이교의 제사장들은, 우상의 영화가 자기들에게서 떠난 것 때문에 탄식할 것이다.’ (호 10:5, 표준새번역)


벧아웬(Beth-aven) ‘사악한 집’, ‘우상(숭배)의 집’, ‘공허의 집’이란 뜻으로 아이성에 가까우며, 벧엘 동쪽, 믹마스 서북쪽에 있는 황무지를 끼고 있는 성읍이다(수 7:2; 18:12; 삼상 13:5). 베냐민 지파에 할당된 곳이기도 하다(수 18:11,12). 중략. 호세아와 아모스 선지자가 하나님의 집이라 불리던 벧엘의 우상 숭배를 경고한 바 있는데(호 4:15; 암 5:5), 호세아는 우상 숭배의 중심지로 타락해 버린 ‘벧엘’을 ‘벧아웬‘이라는 경멸조의 별칭으로 바꿔 부르기도 하였다(호 4:15; 10:5).(라이프성경사전)


이스라엘의 타락의 시작은 성경을 통해서 본다면 길갈과 벧아웬에서 시작이 되었다. 성경사전을 통해서 볼 때 실제 지명인 벧아웬이 얼마나 타락한 곳인지를 볼 수 있다. 호세아가 벧엘을 벧아웬으로 부른 것은 벧엘의 타락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5절을 보면 길갈과 벧아웬이 죄의 타락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길갈을 보자면 이곳은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넌 후 진을 친 곳이며 기념비를 세웠던 곳이고(수 4:19~24), 광야생활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지 못했던 할례를 베풀고 유월절을 지켰던 곳이었다(수 5:2~9) -할례는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했다-.


‘백성이 첫째 달 열흘에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동쪽 변두리 길갈에 진을 쳤다. 여호수아는 요단강에서 가져 온 돌 열두 개를 길갈에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자손이 훗날 그 아버지들에게 이 돌들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거든, 너희는 자손에게 이렇게 알려 주어라. '이스라엘 백성이 이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넜다. 우리가 홍해를 다 건널 때까지,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그것을 마르게 하신 것과 같이, 우리가 요단강을 다 건널 때까지,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요단 강 물을 마르게 하셨다. 그렇게 하신 것은, 땅의 모든 백성이 주의 능력이 얼마나 강하신가를 알도록 하고, 우리가 영원토록 주 우리의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수 4:19~24, 표준새번역)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길갈’ 지명의 뜻이다.


‘주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받은 수치를, 오늘 내가 없애 버렸다." 그리하여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고 한다.’ (수 5:9, 표준새번역)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와 그의 백성들에게 받은 수치와 모욕을 끝내는 곳이기도 했다.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며 세상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장자된 나라로서의 시작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언약이 깃들고 기억이 새겨 곳, 언약을 세우는 곳이 길갈이었다. 그곳이 죄로 황폐되었다. 그곳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형벌의 도시가 되어버렸다.

벧아웬 역시 우상숭배의 중심지였던 곳인데, 벧엘을 벧아웬으로 조롱하듯 부르는 의미는 무엇을까? 벧엘은 이스라엘(야곱)이 꿈에서 하나님을 만난 장소이며(창 28:11~19), 이스라엘을 부르신 하나님의 약속의 장소이며(창 31:13), 하나님의 단을 쌓으라고 명하신 곳이다(창 35:1),-단을 쌓으라는 것은 언약을 세우시거나 확증하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그의 조상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에게 그 언약을 세우셨고, 그의(야곱) 이름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확증하셨던 곳이다(창 35:1~15).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모든 이방 신상과 귀걸이를 땅에 묻고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한 곳이었다(창 35:2).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세우고 정결하게 나아갔던 곳이 지금은 음란과 더러움을 쫓는 곳이 되었다. 언약을 세우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거룩한 백성으로의 시작점이었던  그곳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나님의 진노의 장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과 만났던, 하나님이 함께하셨던 거룩의 땅을 짓밟는 것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제동을 걸었다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만남과 추억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안타까운 것은 신촌을 볼 때마다(연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마치 죄로 얼룩진 길갈과 벧엘을 보는 듯 했다.


연세대학교의 전신은 미국인 선교사 알렌이 고종황제의 인가를 받아 설립한 제중원이라는 병원에서 출발했다. 그 후 루이스 H. 세브란스의 기부금이 출현되었고, 언더우드 선교사가 지금의 대학으로 발전을 시켰다. 과거 그곳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곳이었다면 지금은 자연주의 학문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가르치며 더 이상의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는 곳이 되었다. 이화여자대학교 역시 메리 스크랜트 선교사가 서울 정동의 자택에서 한 명의 학생을 수업으로 시작한 곳이었다. 이 두 학교는 신촌에 위치하고 있고, 그곳은 학문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의 발상지와도 같은 곳이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가서 그곳에 쓰인 묘비를 조용히 숙고하면서 읽어본다면 선교사들이 한국의 근대화에 대해 얼마나 힘을 보탰는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복음이 한국을 변화시킬 것을 믿었고 보이지 않는 한국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한명 한명을 가르치고 열정을 다했다. 그 시작이 신촌이다. 그런데 지금의 신촌은 갖가지 축제와 문화로 얼룩져버렸다. 그곳에서 기도회를 하고 예배를 하고 찬양을 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왜 신촌이 죄를 받아들이고 죄와 타협하는 장소가 되었는가를 영적인 눈으로 보지 못한다면 길갈과 벧아웬이 왜 저렇게 되었는지를 알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초기 선교사들이 학교와 병원을 세웠을 때 신학문과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복음 앞에 순종하며, 겸손과 사랑으로 조선과 세상을 섬기라는 것을 교회는 잊어버렸다.


길갈과 벧엘(벧아웬이라고 경멸히 부름)은 하나님이 나타나신 곳이고 언약이 세워진 곳이며 거룩한 땅이었다. 하나님의 역사와 살아계심과 여전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무소불위하심을 체험한 곳이다. 그곳을 사단은 죄로 얼룩지게 만들어버렸다. 하나님의 기사와 이적과 하나님의 이름이 기억되어야 할 그곳이 허물어져 버렸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으며 조롱하듯 비웃고 있다. 이것이 사단의 책임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논할 문제이지 우리가 논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논해야 할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죄악) 받아들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잊었으며(배반) 우상을 만들었고 타락했다는 것이다.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고 다른 데에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 유다는 히스기야왕이 치리하던 시대였다. 히스기야 왕은 25세에 등극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린바 된 유다를 재건하고 있었다. 그런 유다를 향해 하나님은 경고를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죄를 범하고 행음하여도 유다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유다는 하나님께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백성들은(돌아온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그의 완전함에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또 하나의 죄는 나는 너무도 쉽게 맹세를 하고 그 맹세를 잊어버린다. 맹세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더 큰 의미의 약속이다. 맹세는 흔히들 자신의 부모나, 자신의 지위나, 조상을 가리켜 맹세를 한다. 당시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악(타락)을 정당화하기 위해 ‘야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했었는지도 모른다. 자세한 것은 알 길이 없지만 마태복음 5장을 통해서 본다면 사람들은 자주 맹세를 했었던 것 같다. 나의 맹세는 이미 죄악에 물든 맹세이다. 이스라엘이 야훼의 사심(Living)을 가리켜 맹세했다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들의 죄를 정당화시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본다면 맹세를 하는 것은 모호한 경계선에서 발을 어디로 둘지 모르는 악한 마음의 본질이다.


‘“옛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너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하고, 네가 맹세한 것은 그대로 주께 지켜야 한다' 한 것을, 너희가 또한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말아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발을 놓으시는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큰 임금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너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친 것은 13)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 5:33~37, 표준새번역)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대면해 보라. 하나님과의 언약을 체결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그들의 탐욕과 쾌락대로 죄를 일삼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의 죄악과 잘못된 행실을 깨우쳐 주었지만 이스라엘은 참 하나님인 야훼 하나님을 버리고 그들이 섬기고 싶은 우상을 새기고 그것을 음란히 섬겼다.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야훼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 같이 저희를 먹이시겠느냐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 저희가 마시기를 다 하고는 행음하기를 마지아니하며 그 방백들은 수치를 기뻐하느니라 바람이 그 날개로 저를 쌌나니 저희가 그 제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리라’ (호 4:16~19, 개역한글)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을 먹이지 않으시며 그들의 무너짐을 막지 않으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집 센 어린 암소같이 완강한데 내가 어떻게 그들을 목장의 어린 양들처럼 먹일 수 있겠느냐?”(호 4:16, 현대인의 성경)고 말씀하신다. 그들의 완고함이 극에 달았음을 보여준다. 한국 속담에 ‘소를 물가로 데려갈 수 있어도 물을 먹이지 못한다’고 했다. 이는 사람의 고집이 완고함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속담은 사람을 빗대어서 한다.- 완고함(교만)은 관계를 무너뜨리고 세상을 우습게보며 모든 것을 자기 눈 아래 두려는 속성이 있다. 이스라엘은 마치 완고한 암송아지처럼 하나님을 무시하고 싫어하며 자기 뜻대로 행하고 있었다.


또한 이스라엘이 우상과 음란히 행해도 그것이 하나님에 사람 앞에 죄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 땅의 지도자들이다. 타 번역서로 본다면 ‘대신들은 수치스러운 일 하기를 즐긴다’(호 4:18, 표준새번역)고 표현하고 있다. 좀 더 센 표현으로 보자면 ‘그 자랑스런 직책은 버리고 부끄러운 일이나 즐기는 것들’(호 4:18, 공동번역)이라고 표현한다. 이미 지도자들이 죄를 선동하고 있으며 죄를 죄로 여기지 않은 까닭에 백성들도 그것을 더욱 더 음란히 행하는 것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온 맘과 행동으로 정결하게 살지 못한다면 ‘나도 인간인데’ 라는 합리화로 사람들에게 동정어린 사심을 받는다면 결국 교인들은 성도로서의 삶을 살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성도의 삶은 고리타분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로 치부하게 된다. -이미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은 ‘바람이 그들을 날려 보낼 것’이며 ‘우상에게 제물을 바친 그것 때문에 수치를 당할’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즉 환난 날에 그들을 도울 손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와 타락된 생활로 하나님을 떠났고 싫어했다. 자신들이 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모습이었다. 결국 그들은 수치를 당하고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집 센 어린 암소같이 완강한데 내가 어떻게 그들을 목장의 어린 양들처럼 먹일 수 있겠느냐? (호 4;16, 현대인의 성경)'


‘이스라엘이 우상과 결합되었으니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실컷 마신 다음에 계속 창녀 짓을 하고 그들의 지도자들은 수치를 기뻐하고 있다. 바람이 그들을 날려 보낼 것이다. 그들은 우상에게 제물을 바친 그것 때문에 수치를 당할 것이다.' (호 4:17~19, 현대인의 성경)


이 말씀이 단지 과거 이스라엘에게 외쳐졌던 말씀이라고 보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히 4:12, 표준새번역)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와 의도를 안다면 호세아서에 말씀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나와 이곳에 말씀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나는 완강한 암송아지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게 된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평안하다 평안하다 이 말씀으로 위안을 삼을 것인가. 오늘 주신 이 말씀 앞에 이스라엘의 죄상을 밝히시는 하나님의 증언에 나는 감히 그 어떤 변명도 할 수가 없다. 그분은 여전히 살아계시며 전지전능하시며 무소불위하시며 지금도 계시는 분이시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으시며 말씀하신 바를 지키시는 분이시다. 지금 나는 회개할 때이다.


아멘!
기도












하나님. 내가 완강한 암소처럼 마음을 곧게 하고 목이 굳은 사람이었습니다. 내 생각과 잣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했으며 그것 조차도 내 선택이었고 내 죄악의 모습이며 내가 한 것입니다. 하나님 이스라엘을 그냥 죄 가운데 놔 두듯이 나를 그리하지 마옵소서. 저를 가리켜주십시오. 완강한 암소처럼 내가 하나님을 떠나려 한다면 저를 잡아주시고 주의 사랑으로 저를 알게 하옵소서. 작은 고난에도 견디게 하사 당신의 사랑의 깊은 우물의 물을 마시게 하사 세상의 하나님은 야훼 하나님임을 고백하게 하소서. 나로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나의 나 된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임을 한낫 보잘것 없는 인간이었음을 그런 나를 존귀히 여겨 주심을 감사드리고 도 감사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