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양식/CoramDeo_호세아

[코람데오] 10월25일(화) - 호세아 2장 14 - 23절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TR.H.Lee 2016. 10. 25. 16:06


            

             호 2:14-23 /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묵상]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진노와 심판을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용서와 긍휼만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다. 진노와 심판에 대해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때 궁금했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진노와 심판과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더 진솔하게 보자면 사랑은 진노와 심판과는 상반되고 오히려 사랑은 긍휼과 은혜와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강대한 나라로 만들 수 있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거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시고, 죄를 범한 백성들을 심판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것도 궁금했다. 그리고 약속의 땅에 있는 백성들을(가나안 족속) 쫓아내기까지 하신다. 그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이방 민족의 신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나 음란한 생활을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방 민족을 통해 심판하신다. 그렇게 죄에서 돌아온 백성들을 받아주시고 용서하시며 또 다시 죄의 길로 가는 백성들을 향하여 진노와 심판을 하신다. 이런 일이 반복 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정말로 그들에게 주셨던 땅에서 가나안 족속을 내어 쫓으셨던 것처럼 그들을 내어 쫓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사랑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시며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고 주일학교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과연 사랑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진노와 심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사랑인걸까?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고전 13:4-7, 표준새번역)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사랑에 대해 언급을 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을 대변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이 부분을 살펴보면 이해가 쉽겠다.


고린도전서 13장 4,5절을 읽으면 모두들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새삼 기독교의 사랑에 대해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도 교만도 아니하며~’ 라는 복음송가를 기억해본다. 이 노래는 가요무대에서도 가수가 부른 적이 있었던 노래다. 교회에서 친구들과 기타 치며 불렀던 히트 찬양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6절에 대해서는 그리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아니 이해를 안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처럼 나도 내가 이해되는 부분만 이해하고 나머지는 앵무새처럼 웅얼거리거나 따라했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이 사실에 주목해야한다. 사도요한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요일 4:16b, 표준새번역),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요일 4:18a, 표준새번역) 라고 증언했다.


하나님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시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하나님에게는 두려움이 없으시다. 완전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은 두려움을 내어 쫓으신다. 이 사실을 몰랐고, 알려고 하지 않았고 또 믿지 않았다. - 교회의 지도자들(방송으로 드러난 것을 볼 때)은 불의를 기뻐하고, 진리를 기뻐하지 않는 것 같다. -


처음 말씀을 읽었을 때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잡히는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읽고 또 읽으면서 몇몇 관주를 보면서 진노와 심판의 방식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과 그분의 속성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저의 입에서 제하여 다시는 그 이름을 기억하여 일컬음이 없게 하리라” (호 2:14-17, 한글개역)


하나님의 사랑은 진노와 심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분의 속성이 불의와 함께하실 수 없으며, 진리와 반(反)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한 가지를 보자면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한다.(요 8:32, 36)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즉 하나님이 진리라는 사실이다.(요 8:31) 이것은 명제이고 변개치 않는 사실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진리를 믿는 사람이다. 고린도전서에 13장 6절에서 말하는 진리는 바로 하나님이 시고, 요한일서 4장 16-18절에 나오는 사랑도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 심판과 진노를 드러내셨고 그 사실이 변치 않으실 -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독거리고 계신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을 잘 타일러서(내가 저를 개유하여 - 호 2:14, 한글개역) 그들을 거친 들(the wilderness, NASB)로 데리고 거기서 그들을 위로하신다.
여기서 나오는 거친 들은 광야를 의미하는데 에스겔서를 통해 본다면 이곳은 하나님의 국문(鞫問)의 장소이기도 하다.


“내가 이집트 땅 광야에서 너희 조상을 심판한 것과 똑같이, 너희를 심판하겠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겔 20:36, 표준새번역)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셨던 장소에서 다시 그들을 회복케 하신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은 궁극적으로 그들을 다시 부르시기 위한 사랑의 하나님의 속성임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다.


자녀가 강도와 살인을 일삼으면 어느 부모가 그것을 잘했다고 칭찬하겠는가? 그것을 제동 걸어주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무법천지가 될 것이다. 힘이 있는 자가 법이 되고 권세자가 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좌시(坐視)하지 않으셨다. 만일 좌시만 한다면 사랑이 없거나 그를 심판만 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들의 죄를 국문하던 그 장소에서, 하나님을 배역하고 쫓겨난 그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대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죄악으로 인하여 빼앗긴 것들을 다시 받게 되고, 고통과 아픔의 땅이 소망이 되고 기쁨이 된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처럼 그들이 하나님의 기사와 보호를 기뻐하고 화평을 이루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된 그들은 더 이상 거짓과 술수 그리고 우상의 더러움에서 지배당하지 않게 된다.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 땅에서는 전과자(前科者, 범죄자)가 되면 평생 그를 괴롭히고 차별하고 사회에서 격리시키고 사람들로부터 감시해야할 대상이 되지만 하나님은 자신에게 돌아온 백성에게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으신다. 이미 회개하여 거룩하게 된 백성의 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지워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의 죄에서 거하지 않게 하시는 것도 이와 같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된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지배와 죄의 심판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 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호 2:18-20, 한글개역)


이스라엘이 회복이 되는 날에, 그들이 거하는 땅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을 맺으신다. 그것은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벌레와 맺으시는 언약이다. ‘무슨 생뚱맞은 표현일까?’ 하겠지만 관주를 통해 본다면 그 맥락이 주는 의미를 알 수 있다.


“내가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세우고, 그 땅에서 해로운 짐승들을 없애 버리겠다. 그래야 그들이 광야에서도 평안히 살고, 숲 속에서도 안심하고 잠들 수 있을 것이다.” (겔 34:25, 표준새번역)


우리의 범죄로 자연(自然)은 저주를 받는다. 이것은 이미 아담과 하와, 가인, 가나안땅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저주로 인해 땅은 엉겅퀴를 내며 독사와 독충과 맹수는 사람을 공격한다. 사람을 괴롭히는 벌레가 있는가 하면 사람을 피해 도망치는 생물들도 있다. 또한 보이지 않는 균으로 인해 사람은 알레르기와 희귀병으로 평생을 고생하게 된다. 사람의 죄로 인해 자연은 사람을 거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회복이 될 때 하나님은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벌레들이 그들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신다. 이것이 새로운 언약이다. 생뚱맞겠지만 회복 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가 아니겠는가.


실제로 이런 예는 믿음을 지키고 말씀 앞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고 있다.


배 농사를 짓는 한 농부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 앞에 주일에는 교회에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농사일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시도 때도 없이 들여 봐야 하고 약을 치고 잡초를 제거해야 하고 벌레가 생겼는지 상태를 늘 살펴야 한다. 그러나 농사일을 하는 사람이 신앙을 지키는 것이란 쉽지가 않다. 주변의 조롱과 시비도 생기고 급기야는 친척들도 유별난 신앙을 자제하라고 조언을 한다. 주일에 약을 쳐야 하지만 교회를 가기 위해 그마저도 포기할 때 주변에서는 농사를 망쳤다고 조롱했다. 정말 농사는 망치는 듯 보였다. 약치는 시기를 놓쳤을 때 상당의 배(pear)가 벌레에 의해 상품성도 떨어졌고 먹을 수도 없었다. 그분은 이미 실패한 농사꾼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을 무렵 그 지방에 유례없는 태풍으로 모든 과일이 다 낙과했고 남아있는 것 마저 벌레와 새들에 의해 출하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사실상 출하를 포기한 것이다. 그런데 이미 실패했다고 조롱하고, 망했다고 단정 지었던 농부(성도)의 남아있는 배는 멀쩡히 있는 게 아닌가. 더군다나 낙과하지 않는 것도 기적인데 벌레나 새들의 공격도 없었다. 같은 지역 같은 토양 조건에서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일 이후로 사람들은 그 농부에 대해 비난하거나 힐난하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정말 그리스도인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시장에서 과일 장사를 하시는 한 집사님은 주일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기로 결정했다. 늘 예배만 드리고 장사를 했었는데, 그 때마다 주변 상인들이 눈치와 비난이 이어졌다. 한 가게가 문을 닫으면 주변의 가게 분위기가 흐려지고 시장을 찾는 손님들도 분위기상 발걸음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신앙을 스스로 지키기에는 이 사회에서 어렵다는 것을 그 집사님은 토로하셨다. 내 신앙 때문에 주변이 피해를 받으면 안 되는 것 아니냐는 고민을 하시더니 결국 주일에는 장사를 접기로 했다. 예배가 끝나고 가는 것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주변 상인의 원망과 상가발전회의 권고도 받아왔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주일에 일을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상인들의 반응은 달라졌다. 주일(일요일) 매출이 그 집사님이 장사를 한 주일과 비교했을 때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집사님이 손해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일 장사를 접으면 오히려 손해가 눈에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큰돈을 벌지는 못했어도 주변의 평판이 좋아졌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믿음을 지킨 한 과부 권사님이 계셨다. 당시 집에는 조그마한 텃밭이 있었는데 주변의 집들이 작은 텃밭은 일구고 있었다. 이 권사님은 매일 밤마다 기도하시면서 새벽기도를 나가셨다. 산동네에서 새벽기도를 나가기란 보통 어렵지가 않다. 눈이 오거나 비가 많이 오면 길이 막혀 가지 못할 정도로 높은 언덕과 좋지 못한 길에 집이 있었다. 그 권사님의 텃밭은 상추와 깻잎 호박 등이 있었다. 가을 장마와 태풍이 있었던 어느날 밤 대부분의 집들의 텃밭은 거의 쓰러지고 호박이나 고추 같은 것은 낙과했다. 하지만 이 권사님의 텃밭은 간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멀쩡했다. 피해를 본다면 그 권사님의 텃밭이 피해 1순위여야 했다. 그런데도 그 텃밭은 아무 일도 없는 텃밭이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의 주변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땅도, 농작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향해서는 그 입을 벌려 좋은 것을 준다. 믿기지 않는 말이겠지만, 억지스런 표현 같겠지만 성경은 땅이 저주를 받은 이유와 우리가 죄를 범할 때 땅이 반응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믿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이 주는 유익과 지식을 의지한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것이든 하나님을 앞설 때 죄가 되고 세상의 가치가 되는 것이다. 이런 예는 조금만 눈을 돌리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들짐승과 벌레에게도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이제 그 땅에 평화와 안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전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며, 공포와 두려움이 괴롭히지 못한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내가 된다. 이것은 영원한 관계를 의미한다. 이 영원한 관계에는 오직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로 이루어진다.(19절) 이것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것인데 공의와 정의는 죄와 합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치하셔야 했는지를 이해하는 대목이다. 공의와 정의가 있기 위해서는 죄는 대가를 치러야하기 때문이다. 그 대가를 치른 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려두시지 않으신다. 은총과 긍휼로 그들을 부르신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징계와 심판에서 시작이 된다.


이제 하나님은 진실함으로 이스라엘에게 장가를 드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맞아들일 준비가 된 정결하고 아름다운 신부가 된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응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하리라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호 2:21-23, 한글개역)


“그 삼분의 일은 내가 불 속에 집어 넣어서 은을 단련하듯이 단련하고, 금을 시험하듯이 시험하겠다. 그들은 내 이름을 부르고, 나는 그들에게 응답할 것이다. 나는 그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고, 그들은 나 주를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를 것이다.” (슥 13:9, 표준새번역)


이스라엘과 영원한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응답하실 때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이스르엘에 응답을 한다. 즉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실 때 창조함을 받은 하늘과 땅이 그의 백성에게 응답을 한다는 것이다.


이전에 이방 신을 향하여 분향하고 음란하게 행하고 죄를 경(輕)하게 여기는 백성들이 무엇을 구하여도 그 구함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징계를 통해 새롭게 된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는 그들이 구할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응답하시며 그 응답을 하늘이 응답을 한다. 하늘이 응답한 것을 땅이 듣고 응답한다. 땅은 그 소산의 열매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응답을 한다. - 스가랴 13:9을 비교하여 보라. -


아담이 죄를 범한 후 땅은 저주를 받아 사실상 이 기능이 마비되었다. 땅은 그 소산물을 낼 때 엉겅퀴를 내며 그 땅에 독충과 독사가 거하고 벌레와 맹수는 사람을 향해 공격한다. 사람은 꿀을 취하기 위해 맹독을 품은 벌들을 조심해야 하며, 농사를 짓고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단단한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야 한다. 비옥한 땅이라도 땅은 계속해서 잡초와 해충 짐승들에게 그 열매를 내어준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회복시키실 때 이 모든 상황은 역전이 된다. 아니 회복이 된다. 죄로 인해 받은 저주가 풀린 것이다.


죄의 저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만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복도 잃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을 싫어하는 우리의 죄가 그것을 잃도록 만들었다.


하나님은 죄악을 국문하던 그 땅에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심으셨다. 그리고 이 백성을 향하여 긍휼을 베푸셨다.(루하마-호1:6;2:1) 또한 그들을 백성으로 삼으셨다.(암미-호1:9;2:1)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실 때 그들은 그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찾는다. 그분의 징계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마음을 드릴 때 하나님은 나를 다시 회복시키시며 그 거룩함의 자리로 초대하신다. 죄로 인한 저주를 거두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아름답게 하시며 나와 우리는 하나님의 정결한 신부가 된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엡 2:4) 또한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신 분이다.(시 103:8)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회복시키시며 정결한 신부로 맞아들이신다. 나는 이것을 믿는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시고 항상 거기 그리고 여기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죄악을 보고 계시고 내 말과 행동 그리고 눕는 것과 일어서는 것을 보십니다. 내 죄악이 태중에서 이루어졌으며 죄의 모습을 본받아 살아왔습니다. 누구의 탓이 아닌 내 문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나올 수 없으며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도 없는 타락함 속에 있는 저를 부르시고 징계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고백하는 것은 내가 받아야 할 모든 징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 내가 받는 징계는 나를 연단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 그것을 몰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징계를 받는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오늘 알았습니다. 나를 새롭게 하고 나에게 하나님의 좋은 것을 심으셔서 긍휼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저의 죄악과 습관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늘 내 자신을 보호받기 원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