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양식/CoramDeo_호세아

[코람데오] 10월26일(수) - 호세아 3장 1 - 5절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TR.H.Lee 2016. 10. 26. 14:47


            

              호 3:1-5 /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묵상]



호세아서 1-2장을 본다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그리고 회복을 예언하였다. 이미 호세아서의 내용이 끝나 보였다. 2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키시며, 그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고, 모든 것이 회복이 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3장에서는 다시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를 통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선대(善對)하심을 보여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찌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호 3:1, 한글개역)


이스라엘 자손은 다른 신을 섬기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만들고, 이방신을 흠모하며 그 스스로의 행실을 음란하도록 두었다. 어떤 해석은 이스라엘 백성의 음란함은 성경의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했다. 즉 그들이 이방 신을 섬기고 우상을 만드는 것을 ‘음란’으로 표현한 비유적 화법이라는 것에 의견을 모으고 있다. 하지만 의미적으로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기고 우상을 만드는 행위를 비유적 ‘음란’으로 보지만, 실제로도 음란은 이방 풍습과 이방 신을 섬기는 풍속이었다. 즉 이방 민족의 세계관과 종교는 음란을 동반 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섬긴 것은 음란한 행위를 동반한 것이며(레 17:7), 이방 민족의 풍습 역시 음란하고 가증한 것이었다.(출 18:3, 출18장, 출 34:15-16)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에서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고 그들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에 염병으로 하나님이 징계하시고 음행한 사람들을 죽이신다.(민 25:1-5)


이세벨은 시돈 왕 엣바알의 딸로서 아합의 아내가 되어 이스라엘의 왕비가 된다. 그녀는 아합 왕을 충동하여 바알과 아세라 상(像)을 만들고(왕상 16:31-32), 음행으로 왕국을 더럽힌 장본인이다.(왕하 9:22) - 바알은 남신(男神)이고, 아세라는 여신(女神)이다. 당시 바알과 아세라에게 제사를 하는 행위는 음란을 동반했다. -


하나님께서는 이런 음란한 행위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레 20:5) 음란(음행)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격노케 하는 가증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또한 음행한 사람에 대해서도 성경은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대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고의적인 음행에 대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죽이시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남자든 여자든 예외가 없다.(신 22:13-28, 레 20장)


이처럼 우상을 만들고 다른 신을 섬기며 음란을 행하는 것은 공동체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을 시키는 행위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와 떡을 즐길지라도’(1절)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음란하고 패역하고 끊어져야 하는 백성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 건포도와 떡은 식(食)문화이다.(아 2:5) - 음란한 백성은 마땅히 하나님의 징계가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만 하시고 버리시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이미 2장에서 보았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이 죄에서 깨끗해질 때까지 기다리시겠다는 의미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깨우치고 있다. 지금 호세아 선지자는 음란한 여인을 데려오기 위해 길을 나선다.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호 3:2-3, 한글개역)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고멜을 데리러 간다. 여기서 고멜과 결혼하기 위해 가는 것인지 아니면 결혼 후 고멜이 집을 나가 음란한 생활을 해서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인지, 또는 창기처럼 생활을 하는 것인지는 확실치가 않다. 즉, 은 15 개와 보리 1 호멜 반이 음란함으로 빠진 아내를 구출한 값인지에 대해서도 성경은 설명이 없다. 확실한 것은 고멜은 음행을 일삼는 여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좀 더 추정해 본다면, 1장에서 호세아가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여 낳은 아이들이 3명이다. 여자가 출산하고 몸을 풀고 다시 임신하기 까지 약 2년으로 본다면 호세아는 이스르엘, 로루하마(루하마), 로암미(암미)를 낳기 까지 약 5~6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이 기간에는 고멜이 음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 만일 그랬더라면 성경에 언급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호세아는 고멜을 데려가기 위해 은 15개와 보리 1 호멜 반을 지불한다. 은(銀)은 당시 화폐로 통용되었다. 은 1세겔은 20게라에 해당하였고 무게로 환산했을 때 약 5.7㎏이다. 당시 은 1개가 몇 세겔인지는 모르지만 상당한 양의 은(銀)을 가지고 갔던 것은 분명하다. 또한 보리 한 호멜 반을 가정용 생수통(18ℓ)으로 환산해 보면 약 19통이 되는데 - 보리 한 호멜은 약 230ℓ이다. -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18말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호세아는 고멜을 데려가기 위해 많은 값을 지불했다. 이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그의 의(義)의 자리로 부르시기 위해 비싼 값을 지불하셨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으로 보내셨고, 죄인들과 함께 지내게 하셨으며, 정치와 종교 지도자들의 냉대와 환멸 속에 두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예수 그리스도) 죽이셨다. 그가 어떤 죄를 범해서가 아니라 나의 죄를 속전하기 위해서 그분을 대신 죽이신 것이다. 나와 당신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그분은 그렇게 하셨다.


비싼 값을 치르고 고멜을 데려온 호세아는 그녀에게 과거의 행동을 청산하라고 말한다. 우리 역시 죄의 모습과 죄의 행실에서 벗어난 후 죄와 그 가치를 청산해야 한다. 한국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혐오를 받는 이유 중 하나가 청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어서 거룩한 백성이 되고 그의 의로움에 참여하는 우리는 성화(聖化)가 되어야 한다. 즉 거룩한 행실을 본받는 사람은 거룩함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의 행실을 청산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믿음 생활을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과거의 행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전히 세상이 주는 유익에 관심을 갖는다. 여전히 죄와 타협하고 옹호하며 합리화를 시킨다. 그런데 기독교의 지도자가 그럴 경우 혐오는 극에 이르게 된다. - 기독교 지도자들이 지은 죄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지은 죄를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고 동일하게 죄로 보신다. -


호세아는 고멜이 과거를 청산하고 그의 행실을 바르게 하기 까지 그녀를 기다린다. 하나님도 나의 과거가 청산이 되고 행실이 바르게 될 때까지 기다리신다. 하나님은 급하지 않으시다. 그분은 항상 때를 기다리며 때가 되었을 때 약속한 바를 성취하신다.


성경을 읽다보면 금방 되는 일이 같지만 문맥과 뜻을 잘 보면 그렇지 않다. 호세아가 고멜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자녀 3명을 낳았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본다면 호세아의 순종과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깊다는 것을 발견한다. 나는 단 몇 분 만에 그 상황을 읽었지만 호세아에게 있어서 그 상황은 5~6년의 시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아내를 의심하거나 학대하거나 버리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심지(心志)가 깊고 견고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사 26:3, 한글개역)


호세아는 그의 아내 고멜을 기다린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그녀를 데려왔다. 한 인간으로서, 한 남자로서 고멜을 의심하고 천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일은 호세아가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조롱과 비웃음을 사게 되었다. “그래 너도 그럴 줄 알았어.”, “하나님의 선지자? 웃겨 정말.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 “거봐 결국 그런 여자를 데려오잖아. 호세아도 그런 남자라는 걸 주장하는 거잖아!” 이런 수군거림과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 앞에 호세아는 묵묵히 감내(堪耐)했다. 이런 치욕에서도 그는 그의 아내를 향해 모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선지자였고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다. 선지자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전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하나님을 떠나도 선지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그분을 의지해야 한다. 선지자 호세아는 심지가 견고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성경은 호세아가 고멜을 대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하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호 3:4-5, 한글개역)


이스라엘 백성이 이 말씀을 들으면서 느꼈을 감정을 생각해보라. 어떻게 느꼈을까? 아마도 하나님에 대해 분노가 일어나거나, 그 말씀 앞에 겸비했을 것이다. 4절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권세도, 제사도, 주상(우상)도, 에봇도 없이 지내게 된다.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누리던 권리가 없어지고, 그 어떤 선택권도 없게 된다. 멸망시킨 나라의 종이 되어 숨죽이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드라빔은 가족의 수호신이나 길흉화복의 점을 치는데 사용된 우상이다.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고 재산의 상속권을 상징하기도 했다. 에봇은 하나님의 명에 따라 대제사장의 옷 위에 입는 옷으로써 야훼 하나님을 성소에서 섬길 때 입었었다.(출 28, 39장) 어린 사무엘도 에봇을 입고 하나님을 섬겼다.(삼상 2:18) 또한 다윗이 하나님께 뜻을 구할 때 사용했었다.(삼상 30:7-8) 하지만 본문에서 거론된 에봇은 우상의 하나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기드온은, 이것들을 가지고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가 사는 오브라 성읍에 두었다. 그러자 온 이스라엘이 그 곳에서 그것을 음란하게 섬겨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안에 올가미가 되었다’ (사 8:27, 표준새번역)


‘미가라는 이 사람은 개인 신당을 가지고 있었다. 에봇과 드라빔 신상도 만들고, 자기 아들 가운데서 하나를 제사장으로 삼았다.’ (사 17:5)


포로의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할 것이다. 그들이 섬기고 음란하게 했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방 신을 섬길 때가 더 좋았다고 항의했던 그 생각이 허무해졌을 것이다.(렘 44:17-18)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지 않고,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가기를 싫어했으며, 자기들의 소견에 좋을 대로 행했던 시간들이 얼마나 잘못되고 후회가 되는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의 기간에 배우게 된다.


모든 부족함 없이 풍요로움에서 지내던 사람이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아무것도 없게 되었을 때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은 방탕한 둘째 아들의 비유를 통해 이 부분을 잘 설명해주셨다.(눅 15:11-32)


어느 부자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모든 것이 풍족했고 부러울 것이 없는 아들들이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상속받을 재산의 분깃(몫)을 요구했고, 그것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난다. - 당시 상속은 아버지가 죽을 때 주어지는(승계) 것이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상속을 해 달라는 것은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라는 표현을 나타내는 것으로, 당시 문화로 본다면 둘째 아들은 패역한 아들이었다. - 이 둘째 아들이 타국에서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친구들에게도 외면을 당한다. 하루하루 먹을 것을 걱정하며 살아가던 그 때,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나서 정신을 차리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사람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난다. 하나는 과거에 연연하여 억울함과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분노와 원망으로 살아간다. 또 하나는 이 모든 것의 원인을 스스로에게 찾으며 왜 자기가 여기까지 왔는지를 반성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모든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들이 목숨처럼 여겼던 신들과 우상들 그리고 그들의 쾌락을 위한 모든 것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그들의 선조가 이집트(애굽)에서 나온 그 역사를 추억하며 하나님이 포로 된 자신들을 이 땅에서 구해주실 거라는 걸 보게 된다. 희미하지만 그 믿음을 붙잡게 되고, 그들이 새롭게 되는 그 때 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하나님은 보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찾고 그들의 왕 다윗 - 여기서의 다윗은 구원을 상징한다. -을 구하게 되는 그 감격의 날을 그분은 목도(目睹)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야훼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하나님께 나오며 그분의 은총을 입게 되는 그 날을 보셨다.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곧 포로로 잡혀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그분의 속내를 드러내셨다.


하나님 앞에 발가벗겨졌을 때 - 모든 것을 잃을 때 - 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대면하게 된다. 정직하게 스스로를 살피게 된다. 이전에 들었던 명성과 위로가 헛되며 스스로가 얼마나 교만했는지 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 사람이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을 찾게 하시고 그 은혜의 강가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그리고 쫓아내심은 사람의 죄로 인함이지만 그것을(진노, 심판, 쫓아내심) 통해 그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성경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을 배역하고 이방신을 섬기며 음란을 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던지는 이 예언은 그들을 모조리 멸망시켜서 이 땅에 없이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다시 새롭게 부르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그것을 깨닫게 되고, 그들이 포로가 되었을 때 분노하고 절망하는 동족들을 깨우는 그릇이 될 것이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당신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오늘 다시 새롭게 바라봅니다. 모든 것을 빼앗아감이 죄로 인함이지만 단순히 징계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며 그들을 새롭게 하여 다시 부르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도 배웠습니다. 하나님 지금 제 모습이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는 과정이라는 것을 바라봅니다. 나를 세우실 하나님을 믿습니다. 낮추심으로 겸손하게 하시고 주의 말씀을 경외하게 하심을 믿습니다. 내 행실의 세미한 곳을 주께서 보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바로잡게 하여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 주십시오. 나는 주님의 백성입니다. 자녀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에 살게 하여주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