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양식/CoramDeo_호세아

[코람데오] 10월31일(월) - 호세아 4장 6 - 10절 '심판하시는 하나님 2'

TR.H.Lee 2016. 10. 31. 19:26


            

             호 4:6-10 / 심판하시는 하나님 2


[묵상]



심판을 명하신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택을 해야 했다. 그 말씀은 변개치 않고 속히 이루시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구에게나 임하는 심판이며 누구도 도망할 수 없는 환난이다. 심지어 권세와 높음을 자랑하는 사람들도 그들의 지혜와 정치로 피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이든 선택을 해야 한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 겸비하던지 아니면 더욱 그들의 신을 찾으며 호세아의 경고를 무시하던지 말이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 4:6, 개역한글)


이미 1절에서 ‘지식’에 대해 언급을 했다. 지식은 결국 하나님을 배우고 경외하는 것으로, 그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다. 언약의 말씀을 버린 백성들은 결국 이방민족에게 수치를 당하고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암시해준다.(사 5:13)


하나님(지식)을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버려짐을 받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하신다. 이것은 장자된 나라의 특권과 의무를 빼앗긴다는 의미다.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출 19:6a, 표준새번역)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으로 선택하셨고 세우셨다. 이는 구원이 이스라엘에서 시작이 됨을 의미한다. 이 의미는 율법주의자들로 인해 잘못 해석이 되었고 이스라엘 곧 유대인만이 구원을 받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로인해 이방인과 혼혈민족에 대한 차별정책이 시작된다. 그들은 구약에 있는 이방인들의 관습과 그들의 종교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와 진노를 ‘그들에게 구원이 없다’로 해석했다. 출애굽기 19장 6절의 말씀은 구원이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열방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제사장은 신과 사람을 연결시켜 주는 사람이다. 즉 신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알고 신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며 사람들로 하여금 신으로 인도하는 책무를 갖는다.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신 것은 이스라엘을 통해 만방에 구원을 알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그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 아들을 통해 천하 만민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 이것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창 12:3,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을 잊어버렸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잊어버리셨다. 여기서 잊어버리는 것은 ‘깜빡하여 잊어버리다’의 의미가 아니다.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가르침을 마음에 두지 않으니’로 번역했고, 영어성경에서는 ‘forget’, ‘ignore’로 번역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한 이스라엘을 표현한 것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고, 의도적으로 못 본척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어찌할 줄 모르는 유약한 분이 아니셨다. 오히려 그분은 그들의 행실대로 갚으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은 절기로 지키기 위해 모일 때 마다 하나님의 율법을 낭독해야 했다.(신 31:11) -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이며 지식이다.(신 4:6). - 율법과 율법에 기록된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자손들에게 늘 가르치고,(신 4:9)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야 했다.(신 4:10) 하나님이 이렇게 명하셨던 이유는 이스라엘이 공의(公義)로운 나라가 되기 원하셨기 때문이다.(신 4:8)


이스라엘이 율법을 버릴 때 하나님도 그들을 버렸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날 때 -그들이 악을 선택했고 그것을 섬겼을 때- 그들은 공의로운 제사장 나라가 되기를 포기했다.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사단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과 갈라놓음으로써 열방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계획과 성취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진리에 있어서 중간이 없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은 결국 아닌 것이다. 야구에서 1루 심판이 주자 아웃 판정할 때 1루수가 공을 받는 것과 타자가 1루수 베이스를 밟는 것이 거의 비슷할 때는 아웃으로 판정한다. 즉 세이프는 1루 베이스를 밟는 것이 공을 받는 행위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진리도 예외는 없다.


‘비슷하다’는 결국 ‘괜찮다’는 어감을 준다.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분명 죄인데도 우리는 ‘괜찮다’라고 위로와 합리화를 시킨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율법을 버린 이스라엘 백성에게 ‘괜찮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나도 버리겠다’고 말씀하셨다. 이 무서운 말씀을 우리는 듣기 싫어한다. 오히려 교회는 이야기하기를 꺼려한다. 숫자의 논리 앞에 얽매인 지도자들은 민감한 단어와 어휘를 피하고 있다. 그럴수록 나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있다. 모르고 그랬다고 말을 하지만 상황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이미 알면서도 그렇게 한 것이라고 성경은 증언한다.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저희가 내 백성의 속죄 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저희의 죄악에 두는 도다 (호 4:7-8, 개역한글)


이스라엘은 번성할수록 하나님을 경외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났으며 하나님을 싫어했다. 어느 학자는 이스라엘이 배교한 것이 아니라 배역했다고 주장한다. 배교(背敎)의 뜻은 ‘믿었던 종교를 버리는 것’ 인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이방 종교를 받아들인 것이어서 혼합된 표현인 배역(背逆)으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방 종교를 함께 두는 것을 간음으로 본 것이다. 그 말도 일리가 있지만 하나님은 이런 회색지대의 표현을 싫어하신다. 과정과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 우상을 받아들이는 행위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무시했다’라고 표현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살다보니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잊기로 작정하고 무시한 것이다.


번성한 이스라엘은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평안하다’, ‘안전하다’라고 외쳤을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만큼 스스로를 기만(欺瞞)시키는 것은 없다. 역사를 살펴보면 적을 기만시키는 가장 완벽한 전략은 적이 스스로 이 상황에 대해 ‘괜찮다’라는 방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 작전은 고육지계(苦肉之計)를 쓸 만큼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작전이다. 이렇듯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잘살 수 있도록 고육지계를 사용한다. ‘하나님을 믿어? 괜찮아!’, ‘네가 지금 참 잘하고 있는데 한 가지가 부족하다. 그것이 너에게 큰 지장은 없어. 다만...’, ‘신앙이 좋아야해’ 등 이런 수식어를 통해 나를 안심시킨다. 그리고 어느새 내 곁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 나는 하나님이 없이 살아간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보시며 ‘그 영광을 수치로 바꾸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속죄 제물로 먹고 살면서도 그것을 바치는 백성들을 향해 더욱 죄를 부추기고 있는 것을 고발하신다. 어쩌면 나는 내가 섬겼던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죄를 부추긴 것은 아니었을까? 성경은 구체적인 행위에 대해서 기록은 없지만 이스라엘의 범죄 상(象)을 보면 그것이 무엇인지는 보여 진다. 즉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내 생각과 내 지식으로 살아갔다면 -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 성경을 가르치는 내 행위가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방관하는 것이거나 죄를 짓게 한 것이다. 내 모습이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을 떠난 것이기에 내 가르침이나 노력도 죄로 얼룩진 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무섭고 무서운 말씀이다. 교회 교사와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 겸비하지 않고 그 말씀을 버린다면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짓도록 권고하는 것이 된다.


건강 프로그램(TV)을 보면 안타까운 것이 있다. 건강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의 특징이 항상 실패한 방법으로 자신의 몸을 관리해온 것이다. 이를 테면 그 방법으로 했을 때 결국 실패하고 혼란과 자괴감에 빠지는데도 그 방법을 다시 시도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쩔 수 없어요. 나에겐 선택이 없거든요.”


이스라엘도 그랬었다. 사사 시대로부터 패망한 시대까지 그들의 역사를 살펴보면(사사기, 열왕기上下, 역대기上下)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을 섬길 때, 이방 관습을 따를 때, 율법의 규례를 떠날 때 그들에게 나타난 특징이 바로 이방 민족의 노략과 황폐함이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을 신실하게 찾는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신다. 이런 패러다임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도 그들은 늘 한결같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는 삶을 선택한다. 특히 그들의 삶이 풍요로워질 때 나타난다.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너희에게 주기로 약속하신 그 땅에, 너희를 이끌어 들이실 것이다. 거기에는 너희가 세우지 않은 크고 아름다운 성읍들이 있고, 너희가 채우지 않았지만 온갖 좋은 것으로 가득 찬 집이 있고, 너희가 파지 않았지만 이미 파놓은 우물이 있고, 너희가 심지 않았지만 이미 가꾸어 놓은 포도원과 올리브 밭이 있으니, 너희는 거기에서 마음껏 먹게 될 것이다. 너희가 그렇게 될 때에, 너희는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신 주를 잊지 않게 주의하여라.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만 맹세하여라. 너희는, 너희 가까이에 있는 백성이 섬기는 신들 가운데에, 그 어떤 신도 따라가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 계시는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주 너희의 하나님이 분노하시면, 너희를 땅 위에서 멸하실 것이다.” (신 6:10-15, 표준새번역)


지혜로운 사람은 방법이 잘못 되었을 때 그 방법을 버리고 다른 방법을 찾는다. 아무리 자신이 확신에 근거한 방법일지라도 적용에서 한계를 드러낸다면 그 방법은 잘못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경험에 근거해 하나님을 더욱 찾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을 섬기며 그들의 관습을 좋아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게 될 때 자신들의 소견대로  하나님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삿 17:6) 그들은 마음에서부터 우상을 새기고 있었다.(신 5:8)


우리 역시 다를 게 없다. 작금의 교회가 풍요로움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을 떠나는 일을 부인할 수 있을까? 국가경제가 발전하고 사회의 패턴이 달라지면서 기독교인들은 먼저 교회의 오랜 전통으로 이어온 관습들을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새벽기도회와 금요철야기도회 그리고 부흥회 등이다. 이 모든 것이 직장생활에 맞지 않는다는 현대의 풍요로움과 패러다임 속에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7~80년대에는 주 6일 근무형태였고 그나마 주일에도 일을 하는 기업이나 공장이 많았다. 그럼에도 그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새벽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교회로 향했고 새벽기도회를 통해 하루를 살아갔다. 철야예배는 밤 11시부터 새벽 2~3시까지 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생활에 큰 불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또한 일상생활에서 행하던 부흥회는 저녁 8시에 모여 밤 11시까지 박수치며 찬양하고 은혜의 말씀 앞에 기도하던 시간이었다. 그렇게 신앙을 지켜온 신앙의 1세대의 기반으로 한국교회는 부흥을 이루었다. 하지만 풍요로움에 편승한 교회는 이제 새벽기도회와 금요기도회 그리고 부흥회는 계륵(鷄肋)이 되었다. 시간을 내자니 내 시간을 빼앗긴 거 같고, 안하지나 눈치 보이고 결국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색지대에 놓이게 된다. 교회는 결국 그들의 요구에 수용하여 시간을 변경하는 등의 고육지계를 꾀하지만 결국 요구는 늘어만 가고 말씀 앞에 순종하는 모습은 옛 모습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교회의 규모가 커질수록 강단위의 말씀은 교인들의 눈치를 봐야했다. 어휘선택과 내용면에서도 교인들이 원하는 것으로 해야 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폐부를 찌르는 말씀이 아니라 잘 다져진 죽이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곳에서 친교의 모임도 해야 하고 훈련도 해야 한다. 신앙의 모임도 해야 하고 세상을 향한 도전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더 이상 도전적이고 주도적이지 못하게 되었다. 과거 사회를 향해 도전적이고 주도적인 모습은 이제 가려져있고 오히려 세상이 주는 풍요 앞에 무릎 꿇고 있다. 이제 하나님은 나에게 그리고 그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너를 잊어버리겠다.”


“장차(將次)는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일반이라 내가 그 소행대로 벌하며 그 소위대로 갚으리라 저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행음하여도 수효가 더하지 못하니 이는 여호와 좇기를 그쳤음이니라” (호 4:9-10, 개역한글)


이제 앞으로의 일을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6절에서는 그들이 망하는 이유를, 7-8절에서는 그들의 범죄성을 말씀하셨고, 9-10절은 앞으로의 일어날 일을 말씀하신다. - 장차(將次)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뜻 한다. -


하나님의 심판은 백성과 제사장을 동일하게 대하신다. 제사장이기 때문에 특권을 두지 않으시며 백성이기 때문에 예외를 적용하지 않으신다. 심판(재판) 앞에 모든 것이 동등하며 높음이나 낮음이나 귀한 것이나 천한 것 모두가 소용없다. 심판(재판)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낸다.


“재판할 때에는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여 두둔하거나, 세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편들어서는 안 된다. 이웃을 재판할 때에는 오로지 공정하게 하여라.” (레 19:15, 표준새번역)


“재판할 때에나, 길이나 무게나 양을 잴 때에,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여라.” (레 19:35, 표준새번역)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재판을 할 때에는 어느 한쪽 말만을 들으면 안 된다. 말할 기회는 세력이 있는 사람에게나 없는 사람에게나, 똑같이 주어야 한다. 어떤 사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리고 너희가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 있거든, 나에게로 가져 오너라. 내가 들어 보겠다” (신 1:17, 표준새번역)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생겨서, 그들이 법정에 서게 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옳은 사람에게는 무죄를, 잘못한 사람에게는 유죄를 선고해야 한다.” (신 25:1, 표준새번역)


“그대들은 맡은 일을 할 때에 삼가 조심하여 하시오. 그대들이 하는 재판은 단순히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이 재판할 때에 그대들과 함께 계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명심하시오.” (대하 19:6, 표준새번역)


재판은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세우는 일이다. 가난하다 하여 불쌍히 보고, 권력이 있다하여 두호(斗護)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일이며 하나님의 공의를 허무는 일이다. 한국의 경우 그 판결의 유무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재판관의 정직하고 곧은 마음에 있지 않고 두호와 변론에 있다. 변호사의 능력과 뇌물, 비호 등이 그 결과를 좌우하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일이다. 특히 한 재벌의 총수가 원심에서 형(刑)이 확정되었음에도 8.15특사로 풀려주는 것과 법의 형평성을 고려치 않고 그것을 이용하여 ‘황제노역’을 일삼는 것은 한국에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어쩌면 이런 것들은 그럴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재판의 모습을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런 황당한 판결을 이해할 수 있다. -  그들의 판결이 정당하다는 것이 아니다. - 하지만 그 재판관들이 교회의 지도자라면 어떨까? 이런 생각 앞에 말씀의 경고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재판관과 검사와 변호사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고 교회치리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이며, 세상의 조롱과 판단을 받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38절과 상반된 결과를 그리스도인이라 자청하는 우리가 만들어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그의 백성들을 그 소위대로 갚으며 그 소행대로 벌을 주신다. 마틴 루터가 주창한 ‘이신칭의(以信稱義)’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루터는 행함을 강조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서’로 평가했다. 이신칭의에 대한 성경적인 구원론은 변함이 없고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성경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본다면 이신칭의는 결국 성화(聖化)를 통해 확장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백성은 그 구원의 삶이 행함으로 드러난다. 유대의 사상과 초대교회의 사상을 비교해 본다면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초대교회의 이단사상인 영지주의(靈知主義)는 헬레니즘(Hellenism)의 철학에 기반을 둔 사상이며 이원론이다. 이스라엘이 로마에 점령당하면서 로마가 숭상한 헬라사상(그리스)을 받아들이게 된다. 유대 사상인  히브리즘(Hebraism)은 일원론인데, 학문과 문화에 들어온 헬레니즘은 일원론과 상충된 사상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라’의 명령 앞에 히브리즘은 ‘그래 하나님을 사랑해야해’ 하면서 삶으로 드러낸다.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그 가르침을 행하는 삶을 산다. 그러나 이원론인 헬레니즘은 ‘그래 하나님을 사랑해야해. 그런데 어떻게 사랑하지?’ 라는 논제를 펼치게 된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명제라면 그 명제에 속한 행위가 무엇인지 밝혀줘야 하는 것이 이원론이다. 철학은 바로 헬레니즘인 이원론에서 시작을 한다. 이것은 논리정연하고 학문적이지만 결국에는 말장난으로 끝나게 된다. 영지주의는 이원론에 기반을 둔 사상으로 사람의 육과 영이 분리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영(靈)이 구원을 받기 위해 육의 금욕주의적 노력이 필요했으며 구원 후 육체적인 행동은 그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인데 결국 구원받은 사람은 육체적으로 타락을 해도 이미 받은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성결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명하셨던 축복과 저주는 이런 성결된 삶을 말하고 있다.(신명기 27-28장)


“행위가 깨끗하며 주의 법대로 사는 사람은, 복이 있다.” (시 119:1, 표준새번역)


“내가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주께서는 다 살피고 계시니,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시 139:3, 표준새번역)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자기가 한 만큼 보응을 받고, 선한 사람도 자기가 한 만큼 보응을 받는다.” (잠 14:14, 표준새번역)


“우리는 가인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자기 동생을 쳐죽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가 동생을 쳐죽였습니까? 그가 한 일은 악했는데, 동생이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요일 3:12, 표준새번역)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심판하신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든 은밀한 일을 다 심판하신다.” (전 12:14, 표준새번역)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그것은 율법이 주는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주는 의로움을 뜻한다.(갈 3:16) 그 의로움은 내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내 마음이 믿는 것이다.(롬 10:9) 그래서 구원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 10:10) 그리고 행함은 구원받은 성도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구원을 받았으니까 내 삶에 대해 돌아보지 않는 것은 이원론적인 세계관에 빠지는 것이다. 그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다.


이신칭의를 강조한 사도바울도 하나님의 뜻은 성결한 삶이라는 것을 강조했다.(살전 4:3) 또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욕심을 따라 살았던 옛 모습과 함께 악한 행실을 버려야 한다.(엡 4:22,25,31, 골 3:9) 디도에게는 이 세상의 정욕을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살라고 격려했고,(딛 2:12) 디모데에게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라고 했다.(딤전 4:7) 베드로도 모든 악한 행위를 버리고 순전하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힘쓰라고 했으며,(벧전 1:1-2) 야고보 역시 모든 악한 행위를 버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약 1:21-23)


이처럼 구원받은 성도들의 특징은 옛 사람의 행실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행함을 의미한다. 듣고 구원받은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더욱 견고하여져서 잃어버린바가 되지 않기 위해 옛 행실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선하시고 거룩하신 것처럼 그렇게 살라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소욕과 행실대로 갚으시고 판단하시기 때문이다.(호 4:9, 전 12:14)


하나님을 믿은 아브라함은 강성한 민족의 약속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도(度)를 버린 이스라엘은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처참한 민족이 된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만족함이 없는 백성이 된다.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음행을 해도 자손이 번성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더 이상의 만족함이 없다는 뜻이다. 그들 자신을 위해 한 모든 것이 헛것이 되며 결과적으로 볼 때 그들은 더 이상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아닌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해도 소출이 늘어나지 않으며 그들의 음란함은 더 이상 그들을 번성하지 못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렸고 이방 신을 택했다.


하나님을 버린 백성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 정직하게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싫어한다. 제사장의 나라가 되는 것을 싫어하며, 거룩함을 버리고 공의를 버렸다. 하나님을 버리고 잊어버린 그들을 향해 하나님 역시 그들을 버리시고 잊어버리겠다고 하셨다. 이 모든 일은 그들이 더욱 죄를 짓는 일에만 일삼고 하나님을 싫어하며 그들의 정욕과 쾌락에만 의존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대로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 심판은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징계이며 죄를 소멸시키는 하나님의 보응이다.



[기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온전한 마음과 온전한 행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고 잊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않았고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살아 있지도 않은 이방과 그의 풍습을 섬겼습니다. 주님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이제 예전에 기도한 것을 기억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을 기억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을 기억합니다. 이 기억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 섬길 때 기쁨과 은혜를 내려주십시오. 겸손함을 주셔서 더욱 더 낮아지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을 더욱 기쁘게 하기 위해 살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