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양식/CoramDeo_호세아

[코람데오] 10월28일(금) - 호세아 4장 1 - 5절 '심판하시는 하나님

TR.H.Lee 2016. 10. 28. 17:45


            

             호세아 4:1-5 / 심판하시는 하나님


[묵상]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 (호 4:1-2, 개역한글)


하나님은 죄악 된 이스라엘을 향해서 변론하신다. 전지전능하고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사람과 변론하는 것은 논리에 타당할까? 다른 선지서를 통해서 본다면 이것은 변론 또는 논쟁보다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국문(鞫問)으로 풀이되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그리고 미가서에서도 이와 유사한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주께서 재판하시려고 법정에 앉으신다.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려고 들어오신다.’ (사 3:13, 표준새번역) 이사야서에서는 개역한글에서 번역한 ‘변론’을 표준새번역에서는 ‘재판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영어성경에서는 ‘to contend’(NASB)로 나와 있다.


“주께서 만민을 신문하실 것이니, 그 우렁찬 소리가 땅 끝에까지 퍼질 것이다.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니, 악인들을 칼로 쳐서 죽게 하실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렘 25:31, 표준새번역) 예레미야서에서는 표준새번역은 ‘신문(訊問)’을 개역한글에서는 ‘다투시며’로, 영어성경에서는 ‘a controversy’(NASB)로 번역하고 있다.


“너희 산들아, 땅을 받치고 있는 견고한 기둥들아, 나 주가 상세히 밝히는 고발을 들어 보아라. 나 주의 고소에 귀를 기울여라. 나 주가 내 백성을 상대하여서, 고소를 제기하였다. 내가 내 백성을 고발하고자 한다.” (미 6:2, 표준새번역) 미가서에서는 표준새번역은  ‘고소, 고발’로, 개역한글에서는 ‘쟁변’으로 번역했고, 영어성경에서는 ‘indictment, has a case, dispute’(NASB) 로 번역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변론하신다.(For the LORD has a case~, 1절 NASB) 논리적이 않는 이 문맥은 범죄 한 백성에게도 정당하다는 것을 내포해주는데, 변론하는 것 자체가 상대방의 주장이 정당할 수 있다는 논리를 주기 때문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사람과 변론을 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가 않다. 하나님은 신(神)이시며, 창조주이시고 전지전능한 분이시고,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I AM WHO I AM, 출 3:14)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여 사람이 변론하실 수 있을까? 즉 사람이 아무리 지혜가 깊고 지식이 풍부하여도 그 지으신 자와 변론 하는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성경의 타 선지서와 번역서를 통해 살펴보면 1절의 변론(쟁론)은 범죄한 사람에게 정당성이 있어서 하나님이 변론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상황을 심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국문(鞫問)이다. 즉 죄인의 죄를 드러내는 자리이다.


사랑과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 국문의 자리로 부르셔서 일방적으로 그 죄를 신문(訊問)하신다는 게 말이 될까? 왜 하나님은 그들에게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시지 않는 걸까? 나는 잠시 이런 고민에 휩싸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도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라는 것을 호세아서 1-3장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각설.


1-2절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있어야 할 것과 물리쳐야할 행위를 나열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 앉게 된 이유를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진실(faithfulness)이 없었다. 진실은 거짓이 없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향한 거짓을 우리는 서슴없이 행한다. 내 이익에 관련된 것이라면 누구든 진실보다는 이익에 앞선다. 이 말은 ‘국익(國益)을 위해서라면~’ 이란 논리로 발전한다. 한국 경제와 시장 논리를 보더라도 진실 보다는 많은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정답이 되어버렸다. 진실이 국익이라는 말은 고리타분한 옛 말일 뿐, 국익이 진실이 된 가치관 앞에 사람들은 자신만의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진실하지 않는 백성은 결국 자신의 이익에 결부된 것을 따라가고 그것을 좋게 여길 뿐 정해진 법은 언제든지 무시할 수 있으며 그 법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악(惡)이 된다. 즉 진실이 무너진 백성들의 선과 악은 이익이 있느냐 아니면 없느냐로 구분이 된다.(참고. 잠 14:25, 잠 12:19, 시 33:4;51:6;58:11;118:7-8;145:18, 렘 4:2, 슥 8:16,19;10:2, 고전 5:8, 고후11:3, 요일 3:18, 계19:11)


두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사랑(인애)이 없었다. 영어성경에서는 ‘love’, ‘mercy’, ‘kindness’로 각각 번역하고 있다. ‘사랑’, ‘긍휼’, ‘친절함’은 모두 사랑이다.(고전 13:4-7)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가르치신) 사랑은 상황을 정직하게 보게 하는 힘을 준다. 우리가 서로에게 친절하고 긍휼을 가지는 것은 무조건적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상대방을 기망하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은 죄의 길에서 돌이킬 수 없는 인간을 위해 돌이킬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기다리는 사랑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조건적이란 하나님의 속성이 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인간을 향하여 길을 만들어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즉 죄와 합할 수 없는 그의 거룩함으로 볼 때 인간은 마땅히 죄에 대해여 죽고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긍휼을 베푸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의 길로 들어서게 하신 것이다. 그의 거룩함으로 초대를 하시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건데 죄성(罪性)으로 인해서 진실과 거짓이 가려진 사람은 무조건적인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없다. 결국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사랑이며 천국에서 회복되는 사랑이다.(롬 12:9, 고전 13:12,)


사랑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그 사랑을 자신들의 정욕대로 사용하였다. 우상을 만들고, 이방신에게 분향하고, 음란함을 더러움으로 여기지 못하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만 사랑하게 되었다. 이들의 행위는 상황을 정직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하게 만들며 합리화를 시키게 된다.


세 번째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백성은 결국 하나님과 하나님을 믿는 진실무망(眞實務望)한 그의 백성들을 대적하게 한다.


“나의 백성은 참으로 어리석구나. 그들은 나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어리석은 자식들이요, 전혀 깨달을 줄 모르는 자식들이다. 악한 일을 하는 데에는 슬기로우면서도, 좋은 일을 할 줄 모른다.” (렘 4:22, 표준새번역) - 로마서 16장 19절과 비교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은 무식(無識)한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知覺)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無知)하도다’(개역한글) 라고 탄식을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행위이다. 드러내놓고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현대 사상에도 맞물리는데 사람들은 악한 것을 논리적으로 더욱 학문적이 되게 하며 원천적으로 선한 것은 가치 없게 보게 한다. 즉 선한 일에는 주저하거나 힘을 들이지 않지만 그들의 이익이 결부된 일(惡)에는 더욱 더 신중하고 정당화 시킨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선(善)을 행하는 기초다.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 백성들은 하나님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단지 신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고집하는 선지자와 사람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미운 털이고 고지식한 사람들이다.


진실과 사랑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공통점은 거짓이 없는 상태이다. 이 땅위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도 거짓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스갯소리로 농(弄)을 일삼고, ‘카더라’는 말로 상대방을 찔러보고, 모른 척, 당황한 척, 그리고 화를 내며 거짓을 감추고 숨기면서 살아간다. 그래도 7~80년대까지는 가정과 학교에서 정직을 가르쳤다. 비록 잘못을 해도 정직하게 그 일을 뉘우치고 반성하면 오히려 그 학생에 대해 좀 더 나은 평가를 주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80년대 중반부터 정직은 그냥 도덕책에 나오는 일종의 ‘단어’로 표현 되었다. 그 시대에 유명 대학에서 컨닝(시험 시간 남의 답안지나 쪽지를 훔쳐보는 등의 행위)이 적발되었고, 촌지로 학생 평가가 좌우되었다. 오히려 관계를 맺고 서로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을 찾게 되면 굳이 열심히 노력하거나 공부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사회에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 이것은 큰 충격이었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근심이 현실이 되었다. 진실 무망해야 할 기독교인들이 거짓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사회의 문제점으로 떠오르는 땅 투기의 적발된 사람들이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고 지도자들은 자녀들을 정직하고 올바르게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키우기 보다는 좋은 학교,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눈을 돌렸다. 정직이 선행되어 좋은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좋은 미래를 위해 정직을 포기한 것이다. 과거에 이웃사촌끼리 삼삼오오 함께 하면서 부탁하고 손수 알아봐주는 좋은 모습들이 이제는 청탁과 뇌물로 얼룩져 ‘김영란 법’까지 생겨나게 했다. 우리 사회는 거짓말 하는 사람보다 강도 살인의 죄를 범하는 사람들을 더 미워하고 공격을 한다. 사실 거짓말은 강도 살인에 준하는 죄와 동일하게 봐야한다. 십계명을 읽어보라.


국민들에게 신망과 존경을 받아야할 정치와 정부의 사람들도 거짓말을 하고, 학문적 존경심을 받아야 할 교수들도 거짓말을 한다. 연예인들도 학력을 위조하는 거짓말을 하고, 교회의 지도자들도 거짓말을 한다. 그 거짓말을 감싸기 위해 모른 척 하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일이다.


우리는 거짓이 교회와 국가 그리고 공동체를 망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애써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을 큰 죄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죄의 경중으로 본다면 거짓처럼 큰 죄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죄를 범했을 때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고 두 번째는 하나님을 기망시켰다.(속였다) 아담은 그의 아내 하와에게 죄의 원인을 돌렸고(핑계), 하와는 뱀에게 돌렸다.(핑계) (창 3:9-13) 그리고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후 아벨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대답했다.(창 4:8-9) 핑계하는 것, 모른 척 하는 것 모두 거짓행위이고 거짓말이다. 이처럼 죄는 거짓을 행하도록 한다.(요일 2:22, 사 30:9, 잠 19:22, 잠 30:6, 렘 9:5, 계 21:8,27, 잠 19:5, 시 5:6, 요 8:44)


이제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고 있다. 그들은 저주, 사위(사기), 살인, 투절(도적질), 간음, 살인이 늘 끊이지 않았다. 사실상 법의 기능이 마비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 그리고 우리의 죄로 인하여 이 땅에 저주가 왔다.(창 3:17) 그 저주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다.(갈 3:13) 그리고 그 저주는 에발 산에서 행한 것으로, 말씀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을 배역한 사람들을 향한 저주였다.(신 27:13-16;28:15-68) 이 저주의 내용은 이렇다.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찌니라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계모와 구합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무릇 짐승과 교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그 자매 곧 그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과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그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신 27:15-26, 개역한글. 신 28장 읽어볼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리시는 저주의 원인은 하나님이 정하신 정도를 걷지 않을 때 내리신다. 더더욱 근심되고 우려가 되는 것은 이 내용이 이미 작금의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우상을 만들고(섬기고), 부모 섬기기를 싫어하고, 이웃의 경계를 침범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더 홀대하며, 가난한자의 재판은 무전유죄(無錢有罪)가 되고, 근친상간(近親相姦)이 일어나고, 동물과 교접(交接)하며, 살인과 뇌물 등이 노골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결국 우리도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없다. 이 말씀을 통해 악을 행한 백성에게(신 28:20a) 저주를 내리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두려워하며 섬겨야 한다.(신 28:20~68)


2절에 나오는 내용 모두 이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이것은 이미 신명기에서 나온 바와 같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행위임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은 패역한 백성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첨부하자면 고대에 나오는 신들의 저주나 주술적 행위는 거짓임을 보아야 한다. 저주는 오직 전지전능한 하나님 외에는 할 수 있는 신이 없으며 하나님외의 모든 신은 거짓이고 만들어낸 신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술가들이 행하는 저주의식은 하나님을 배역한 행위인 동시에 거짓을 강요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무릇 거기 거하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호 4:3, 개역한글)


죄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슬픔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들의 쇠약한 모습은 죄악에 빠진 과거의 모습들을 더욱 처량하게 한다. 과거에는 힘이 있었으나 지금은 구걸해도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또한 그들의 죄로 땅과 환경도 저주를 받는다. 더 이상 땅에는 들짐승이 없으며, 공중에는 새들이 없다.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고자 하나 헛됨을 알게 된다. 이처럼 저주는 내가 누리던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


“그러나 아무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 같이 되었음이니라 너는 낮에 거치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거치리라 내가 네 어미를 멸하리라” (호 4:4-5, 개역한글)


4절에서 ‘아무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 말라’는 위로의 소리가 아니다. 더욱 책망을 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목소리다. 표준새번역에서는 ‘제사장아, 이 일로 네 백성이 너에게 불만이 크다’라고 번역했고, 현대인의성경에서는 ‘너희 제사장들아, 내가 너희를 책망한다’로 번역했으며, 공동번역에서는 ‘사제야, 내 백성이 다 너희와 같은 꼴이 되었구나’(4절) 번역하고 있다. 즉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다투거나 책망할 어떤 근거도 없다는 것이다. 조삼모사(朝三暮四)처럼 그들의 모습이 매한가지이(the same)고,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인 것이다. 근묵자흑(近墨者黑)처럼 그들 모두 죄를 가까이하고 죄를 함께했다는 것을 성경은 낱낱이 고소(告訴)하고 있다.


“너는 낮에 거치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거치리라 내가 네 어미를 멸하리라” (호 4:5, 개역한글)


‘거치겠고’(stumble, NASB)는 걸려 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제사장들은 낮에 넘어지겠고, 선지자들은 밤에 넘어지는 것은 제사장들의 제사와 제사장들과 함께 있는 선지자들의 예언을 폐한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이제 무의미해 진다. 그들이 이방신을 찾고 분향하던 그 모습을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시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며 그들의 분향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들과 함께 있는 선지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일 것이며 이방 선지자들일 수도 있다. 이스라엘을 향해서 거짓말을 일삼은 그들의 예언을 백성들은 더 이상 듣지 않게 된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 허무한 데서 오는 모든 것을 쓸모없게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거짓된 삶을 살았다. 진실함을 버리고 이방민족의 가르침을 따랐으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음란함으로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사랑했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리고 이방 신을 배우기를 열망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와 도덕성을 상실하게 되고 땅은 저주를 받아 더 이상 들짐승이 거하지 않게 되고 공중의 새도 보이지 않는다. 물고기를 잡고자 하나 잡을 물고기가 없으며 땅은 포악한 백성들을 향하여 엉겅퀴만 낸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버려졌다. 그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고 그 저주가 그들의 모든 것을 덮었다. 아직 ‘평안하다. 평안하다.’ 외쳤을 때 그들에게는 이미 평안이 없었다.(렘 6:14) 이런 일로 그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묻고 해결을 위해 노력을 하지만 그것도 무의미하다. 이미 이 일을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이다. 종교인들의 오랜 관습은 하나님을 찾기 보다는 하나님을 내세우면서 다른 신을 찾았고, 음란함과 부귀영광만을 원했으며, 자신들의 욕구만 채워갔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배우기보다는 보이는 현상학적인, 종교지도자들의 삶을 동경한다.(부귀와 명성)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와 종교적인 열심을 폐하시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어디서 어긋났는지 찾으려하지 않는다. 더욱 더 서로에게 책임을 묻는다. 더욱 더 상황을 개선해보고자 방법을 내세운다. 더욱 더 거짓과 술수와 기만에 빠져든다. 이제 하나님은 그들을 멸하기로 결정하신다.


우리는 아직 힘이 있을 때 주 야훼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는 민족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 저주에 놓일 수밖에 없다. 저주는 주술가나 우리의 원수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내리는 주술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다. 죄의 보응이다. 이 무서운 말씀 앞에 나는 또 다시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스라엘이 결국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고 패역한 삶을 사는 것을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바라봅니다. 주님. 제가 일과 섬김에 진실하지 않았고, 정직하게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힘들다는 핑계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홀히 했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거짓말(핑계)로 나를 합리화 시키고 타협하는 제 모습을 회개합니다. 하나님 진실 무망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일으켜주십시오. 정치인을 일으켜주셔서 하나님께 무릎 꿇게 하여주십시오. 교회의 지도자들이 명예와 권력과 부귀를 내려놓게 하시고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교회가 새롭게 되게 하여 이 땅위에 하나님의 이름이 선하게 높아지게 하여주십시오. 세상이 주는 안목과 정욕과 자랑에 무릎 꿇지 아니한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일으키셔서 이 땅이 새롭게 되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가정과 지역과 나라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그 날을 소망합니다. 사랑합니다.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