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양식/CoramDeo_호세아

[코람데오] 10월19일(수) - 호세아 1장 1절 '낮추시는 하나님'

TR.H.Lee 2016. 10. 19. 12:49

            

                호세아 1:1 / 낮추시는 하나님


[묵상]



'주님께서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주신 말씀이다. 때는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왕이 이어서 유다를 다스리고,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이다.'(호세아 1:1, 새번역)



아하스 왕 : 낮추시는 하나님


요담이 죽고 나서 그의 아들 아하스가 유다를 통치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요담은 25세에 왕이 되었고, 아하스는 20세에 왕이 된다. 그러나 그들의 재위기간은 똑같게도 16년이다.
요담이 21세에 아하스가 태어났다. 시기적으로 본다면 아하스가 유아기에 그의 선조인 웃시야가 하나님을 배역했을 거라고 볼 수 있다. 웃시야가 문둥병(한센병)에 걸려 별궁으로 쫓겨나는 것 역시 아하스 에게는 기억으로 남지 않았을 것이다.


아하스는 그의 부친 요담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부친 요담은 그의 선조 웃시야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이었다면, 아하스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배척한 신앙이었다.(왕하 16장, 대하 28장)


'오히려 그는 (북)이스라엘의 왕들이 걸어간 길을 걸어갔고, 심지어 바알 신상들을 부어 만들기까지 하였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을 하고, 자기 아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쳤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민족들의 역겨운 풍속을 본받는 행위였다. 그는 직접 산당과 언덕과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물을 잡아, 이방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분향하였다.'(대하 28:2-4, 새번역)


아하스의 행적을 살펴보면, 북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나님을 배역한 것을 본받았다. 바알 신상들을 부어 만들었고,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을 했다. 거기서 자기 아들(왕자)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쳤다. 또한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이방 민족의 역겨운 풍속을 따라했다. 자신의 아들까지 불로 태워 죽이고, 이방의 풍속(성적인 타락)을 따라 하는 등 그 자신이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는 아하스를 시리아(아람) 왕과 (북)이스라엘 베가 왕에게 넘기신다. 시리아왕은 포로를 사로잡아 다마스쿠스(다메섹)로 끌고 가고, 베가 왕은 유다의 용사들을 12만 명과 마아세야(왕자), 아스리감(궁내대신), 엘가나(총리대신)를 죽인다.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북이스라엘은 남유다의 사람들, 아내들과 아이들까지 합쳐 무려 20만 명이나 포로로 사로잡았고 물건도 많이 약탈하여 사마리아로 끌고 같다.(대하 28:5-8) - 당시 여자와 20세 미만 아이는 개수에 포함하지 않는고, 포로는 노예로 삼기 위함이다 -


상황은 악화되어갔다. 아하스 왕은 그의 선조인 웃시야와 요담이 회복한 영토를 빼앗기고 점령당했다. 에돔 사람이 다시 와서 백성을 포로로 끌고 갔다. 블레셋도 유다의 평지와 남방 성읍들을 침략했고, 벳세메스와 아얄론과 그데롯을 점령했다. 또한 딤나와 김고와 인근 마을들을 점령하고 빼앗기게 된다. 이런 일의 이유를 성경은 간단하게 말해주고 있다.(대하 28:17-18)


'이스라엘의 아하스 왕이 백성을 부추기어 주님께 크게 범죄 하였으므로, 주님께서 유다를 낮추셨던 것이다.'(대하 28:19,새번역)


'유다를 낮추셨다'는 번역은 공동번역에서는 '유다를 꺽으셨던 것이다'로 되어 있고,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형편없이 낮추셨다'로 되어 있다. 영어성경에서는 'had humbled'(NIV, NASB), 'brought Judah low'(KJV, NRSV)로 번역이 되어 있다.


웃시야왕 때부터 본다면 약 70여 년 동안 유다는 강대한 제국이었고 번영을 누렸다. - 웃시야 제위기간이 52년, 요담 재위기간이 16년 - 그런데 웃시야와 요담의 뒤를 이은 한 나라의 지도자(아하스 왕)가 하나님을 버렸다. 그 강대함과 풍요로움이 어디서 왔는지를 기억하거나 고민하지도 않았다. 성경은 '그 하나님 야훼 보시기에 정직히 행치 아니하고'(왕하 16:2, 개역한글), - 새번역에서는 '올바른 일을 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열 왕의 길로 행하며'(왕하 16:3, 개역한글) '아하스가 유다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야훼께 크게 범죄 하였으므로'(대하 28:19, 개역한글) 라고 증언하고 있다. 웃시야 왕은 그의 백성들에게 악을 행하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주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못했다.(현대인의 성경)


오랜 시간(기간)동안 평안하고 모든 일이 잘 풀릴 때 사람은 교만에 넘어지게 된다. 나는 모든 일이 잘 풀리기 보다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시간이 교만의 시작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이상하리만치 교만은 교만으로 여기지 않게 만든다. 오히려 교만은 내가 하는 일이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사람들로 부터 인정받고 있다고 각인시킨다. 마치 '가랑비에 옷이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내 생각과 내 행동은 교만이 주는 합리화에 젖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교만해질 때 징계하신다. 낮추신다.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의 자녀이고 백성이며 그의 거룩한 피로 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왕 아하스를 낮추고 계셨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이 문제가 아하스만의 문제일까? 나도 하나님의 의도를 알려고 하지 않으려고 했다. 죄는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을 멀리하게 만든다. 하나님 없이도 잘 할수 있다고 격려한다. 하나님도 그런 나를 대견하게 여길 거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죄는 공기 중에 보이지 않는 곰팡이 균과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곰팡이 균에 장시간 노출이 되면 몸은 저항력을 하나둘씩 잃게 된다. 이처럼 죄에 대한 반응이 무뎌지게 만드는 결과를 내 자신을 통해 보게 된다. 아하스가 겪는 문제는 내 문제였다.


아하스 왕은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았다. - 시리아(아람)와 (북)이스라엘이 유다를 정복하지는 못했다 - 그는 앗시리아(앗수르)왕 디글랏빌레셀 왕에게 전령을 보내어 앗시리아의 속국이 되기를 자청하고 도움을 구하며 앗시리아 왕에게 성전과 왕궁의 보물들을 예물로 보낸다. - 역대기서에서는 대신들의 보물도 포함시킴 - 디글랏빌레셀은 아하스의 요청을 수락하고 다마스쿠스(다메섹)를 함락시킨다. 이때 아하스 왕이 디글랏빌레셀 왕을 만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는데 그는 다마스쿠스에 있는 이방 신을 섬기는 제단에 매료가 된다. 이 일로 인해 그와 같은 제단을 유다에도 만들게 되었고 왕이 직접 그 제단에 제물과 화목제물의 피도 드리게 된다. 그는 주님의 성전 사이에 있는 놋제단을 새 제단의(다마스쿠스의 제단) 북쪽에 갖다 놓았고, 주님의 제단과 대야 등을 훼손시켰으며 앗시리아 왕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성전안의 안식일 전용 통로를 막아버리고 성전 바깥의 전용 출입구를 모두 없애버렸다.(왕하 16:7-18)


역대기서를 읽어본다면 열왕기서에 나온 것 보다 더 심각한 모습을 보게 된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었는데도, 아하스 왕은 주님께 더욱 범죄하여, 자기를 친 다마스쿠스(다메섹)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시리아(아람) 왕들이 섬긴 신들이 그 왕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면, 그 신들이 나를 돕겠지"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오히려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아하스는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는 기구를 거두어다가 부수고, 또 주님의 성전으로 드나드는 문들을 닫아걸고, 예루살렘 이곳저곳에 제단을 쌓고, 유다의 각 성읍에 산당을 세우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조상 때부터 섬겨 온 주 하나님을 진노케 하였다.'(대하 28:22-25, 새번역)


아하스 왕은 성전으로 드나드는 문들을 폐쇄시켰다. 또한 예루살렘 곳곳에 이방 제단을 쌓았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우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을 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성전 문을 폐쇄시켰다는 것은 야훼 하나님이(The LORD, God) 그들에게 있어서 실패한 신(gods)이었고, 그저 신들 중 하나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는 곳곳에 제단을 쌓고 누구든지 원할 때 신들(gods)을 찾도록 하고 있다. 이것이 백성들 보기에 좋았을 것이다. 형식을 벗어버리고 자신들의 생각과 편할 대로 신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예배의 위험성 - 또한 유다의 각 성읍에 산당을 세우는 것은 굳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절기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더 이상 그들 마음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하스는 이집트(애굽)에서 불러낸 주 야훼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gods)을 찾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죄는 이렇게 형식을 벗고 형식에서 자유로워지라고 촉구한다.


그의 선조는(웃시야 왕) 주님의 제단에 향을 피우려다가 그 행동을 말리는 제사장들에게 분노했다. 그 일로 문둥병이 발하였다. 그러나 아하스는 주님의 놋제단을 멋대로 옮겼고 훼손시켰으며 성전 안과 밖의 전용 통로와 출입구를 없앴다. 오히려 이방신의 제단을 만들어 성전에 뒀는데도 문둥병이 발하지 않았다. 이 사실이 아하스 왕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웃시야 왕은 그의 곁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스가랴가 있었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적극적으로 말린 용감한 80명의 제사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하스 왕의 곁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할 사람이 없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용감한 제사장들도 없었다. 오히려 제사장은 왕의 명령 앞에 하나님을 버렸다.(왕하 16:10-14) 아니 이미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웃시야 왕이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할 때 그 자신이 문둥병이 발하였고, 아하스 왕이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할 때 그 자신과 백성이 고통을 받는 것을 본다. 웃시야 왕의 죄는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였었지만 아하스 왕의 죄는 하나님과 아하스 그리고 백성과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아하스 왕이 백성을 부추기어 주님께 크게 범죄 하였으므로'(대하 28:19a, 새번역)


개인의 죄는 개인이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개인의 문제가 공동체까지 영향을 받는다면 공동체 역시 함께 책임을 감내해야 한다. 어제(2016.10.18) KBS 시사 프로그램 '제보자들'에 모 교회의 J목사와 女교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누가 보아도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J목사의 소개로 女교인과 결혼한 K성도는 17년 동안 자신의 친자로 알고 지낸 아들이 유전자 감식 결과를 통해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이 되었다. 허탈하고 황당했으며 배신마저 느껴졌을 것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J목사는 법적인 공신력이 있는 기관에서 한 친자확인에서 99.99% 친자가 일치했는데도 이를 부인하며 '신앙인은 공감할 부분'이라는 말과 함게 '기적'으로만 몰아가고 있다. 女교인 역시 그런 부정적인 일이 없었다고 말을 한다. 교회는 그 스스로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 이 책임에 대해 개인에게만 있는 문제이지만 공동체가 개인을 두호하고 바른 말을 하는 것에 대해 공격을 한다면 공동체 역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악인을 의롭다고 하거나, 의인을 악하다고 하는 것은, 둘 다 주님께서 싫어하신다.’ (잠 17:15, 새번역)


‘악인에게 '네가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서 저주를 받고, 뭇 민족에게서 비난을 받을 것이다.’ (잠 24:24, 새번역)


이런 행태만이 전부일까? 목사와 전도사의 성문제에 대해서는 방송에 나온 것은 전부가 아니다.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이미 이런 문제는 90년 초에 책으로 실리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사회적인 문제가 되어도 교회와 교단은 이 부분에 대해 쓴소리와 자숙을 하지 않고 있다. 분명 잘못된 것은 잘못이라고 말해야 하고, 책임이 있는 부분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교회와 교단은 용서와 은혜라는 측면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다시 세우거나 모르쇠 한다. 용서는 당사자의 문제다. 당사자의 문제를 조율하는 것 역시 교회의 역할이겠지만 선을 긋고 결론을 내려주는 것은 잘못 일게다. 작금은(교단) 왕을 향해 쓴 소리를 마다않던 80명의 제사장들과 왕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 옳게 살아야 하는 것을 가르쳤던 스가랴가 이 땅에는 필요 없다는 듯 우리 스스로를 비웃고 있다.


내 자신이 공동체와 주변을 충동하거나 부추길 수 있다는 것을 열어놔야 한다. 나는 완벽하고 하나님 앞에 잘 살아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내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잘 살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인정하고 평가하는 것은 하나님이시지 나도 주변도 아니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 많은 묵상과 깊은 묵상을 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왜냐하면 아하스와 같이 공동체를 향해 죄를 용납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부분에 대해 내 기억을 더듬고 회개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또 다시 죄의 감염자로 불리게 된다.


여기에 흥미로운 것이 있다. 하나님의 음성이 누구에게로 향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이스라엘 군대는 그들의 동족인 유다 사람들을, 아내들과 아이들까지 합쳐 무려 이십만 명이나 사로잡고, 물건도 많이 약탈하여 사마리아로 가져갔다. 사마리아에 오뎃이라는 주님의 예언자가 있었는데, 그가, 사마리아로 개선하는 군대를 마중하러 나가서, 그들을 보고 말하였다.


"주 당신들의 조상의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당신들의 손에 붙이신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당신들이 살기가 등등하여 그들을 살육하고, 그것으로 성이 차지 않아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남녀들까지 노예로 삼을 작정을 하고 있소. 당신들도 주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오. 당신들은 이제 내가 하는 말을 들으시오. 당신들이 잡아 온 이 포로들은 바로 당신들의 형제자매이니, 곧 풀어 주어 돌아가게 하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진노하셔서 당장 당신들을 벌하실 것이오."(대하 28:9-11, 새번역)


에브라임 자손의 지도자 네 사람, 곧 요하난의 아들 아사랴와 므실레못의 아들 베레갸와 살룸의 아들 여히스기야와 하들래의 아들 아마사가 역시 싸우고 개선하는 군대를 막아서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 포로들을 이리로 끌어들이지 마시오. 이런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우리가 모두 주님 앞에서 죄인이 되었소. 당신들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더욱 많게 하였소. 우리의 허물이 이렇게 많아져서, 우리 이스라엘이 주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되었소."(대하 28:12-13, 새번역)


무장한 군인들이 이 말을 듣고, 포로와 전리품을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넘겼다. 사람들이 위의 네 지도자들에게, 포로를 돌보아 주도록 임무를 맡기니, 그 네 사람이 전리품을 풀어서, 헐벗은 이들을 입히고, 맨발로 걸어온 이들에게 신을 신기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져다주고, 상처를 입은 이들에게는 기름을 발라 치료하여 주고, 환자들은 나귀에 태워 모두 종려나무 성 여리고로 데리고 가서, 그들의 친척에게 넘겨주고, 사마리아로 되돌아왔다.(대하 28:14-15, 새번역)


(북)이스라엘 군대가 (남)유다의 포로들을 사마리아로 끌고 갔을 때 사마리아성의 주님의 예언자 오뎃과 에브라임의 지도자 아사랴, 베레갸, 여히스기야, 아마사가 그들의 행동에 제동을 건다. 요지는 위에서 본바와 같다. 하나님이 (남)유다에 진노를 하셔서 (북)이스라엘 군대를 통해 징치하셨다. 그래서 동족인 포로들은 돌려보내야 한다. 에브라임의 지도자 네 명도 개선하는 군대를 막아서며 포로들을 돌려보낼 것을 촉구하고 있다. 각설.


주님의 선지자와 지도자를 통해 이스라엘 군대는 선과 악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아하스와 이스라엘 군대의 차이다. 이스라엘은 예언자와 지도자들의 말에 귀를 경청했지만 아하스는 경청할 귀가 없었다.


15절을 본다면 그들의 선대함이 풍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전리품을 풀어서 헐벗은 이들을 입혔다. 맨발인 동족들에게는 신을 신기었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었다. 상처 입은 동족들에게는 기름을 발라 치료를 해주었고 몸이 아픈 동족들은 나귀에 태워서 이동 시켰다.


나와 당신은  바보를 경멸하며 책(責)잡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정직하고 선을 행하는 것은 손해 보는 짓이며 바보라고 말을 한다. 자기의 권리는 스스로가 챙기지 않으면 안 된다. 심지어 각종 감시 장치를 통해 고소하고 배상을 받아내며 살아간다. 전쟁에서 이기는 자는 전리품과 포로를 취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군인들의 수고를 전리품으로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동족으로 하여금 노예가 되었을 때는 제 7년이 되는 해에 놓아줄 것을 명령했고(신 15:12), 성경 곳곳에서도 형제를 학대하거나 복리(複利)를 받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같은 민족인 동족에게도 가혹하게 대하는 문화와 풍토가 생겨났다. 특히 지역감정과 함께 학벌주의가 생겨났고 이것을 뛰어넘는 금수저의 계급도 생겨났다. 내가 내 형제를 향하여 선을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가족과 이웃 그리고 타인을 향하여 함부로 대하거나 존중히 여기지를 못했다. 내 그릇만을 챙기고 있었다. 권리를 찾지 않으면 바보라는 관념에 갇혀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권리에 우선을 두는 삶을 살고 있었다.


아하스는 36세에 그 조상에게로 돌아간다. 그의 부친 요담은 41세에 그 조상에게로 갔다. 그러나 같은 치리 기간이었지만 성경은 아하스의 죄목들을 고하고 있다. 몇 줄 안 되는 행적이라도 그가 하나님을 경외한 삶을 살았다면 그래서 성경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면 그는 분명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이다. 반면 백성들에게 신망을 얻고 인기와 지지를 받았을 왕이라도 성경이 그를 악한 왕이라고 평가한다면 그는 분명 악한 왕이다. 오늘 말씀은 나에게 세세하게 다가온다.




[기도]



하나님. 오늘 말씀을 통해 내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지를 바라봅니다. 내가 교만을 어떻게 대하고 받아들이는 지를 봅니다. 내가 얼마나 사람들을 향하여 내 권리만 찾았는지를 봅니다. 교만이 나를 두르고 죄를 가벼이 바라보며 주의 말씀을 걸림돌로 삼았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뢰하기 보다는 실패한 내 마음에 의지를 하며 살아갑니다. 이미 실패했는데도 그것을 붙잡습니다. 하나님이 이것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또한 내가 공동체를 향해 지은 죄를 고발하여 주시고 내 입으로 토설케 하여주십시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죄와 사망이 들어온 것처럼 저의 불순종으로 인해 공동체에 하나님의 경히 여기는 마음이 들어온 것이 분명 있습니다. 보게 하시고 토설케 하시며 죄 앞에 교만하지 않게 하여주시기를 저를 도와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