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주신 말씀이다. 때는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왕이 이어서 유다를 다스리고,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이다.'(호세아 1:1, 새번역)
히시기야 왕 :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열왕기서에 보면 호세아 3년에 히스기야가 왕이 된다.(왕상 18:1) 여기서 말하는 호세아는 선지가 호세아가 아니라 (북)이스라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왕이다. - 그는 (북)이스라엘이 마지막 왕이다. - 히스기야 왕에 대한 기록은 열왕기서와 역대기서에 많은 양을 할애하고 있다.(왕하 18-20장, 대하29-32장) 히스기야 왕은 그의 선조 웃시야와 요담 그리고 아하스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그는 왕으로써 한 인간으로써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철저히 배격하고 야훼 하나님 경외하기를 늘 힘쓰던 사람이었다.
또한 히스기야 시대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였다.
'이것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다.'(이사야 1:1, 새번역)
히스기야가 25세에 왕이 된 것을 보면 그의 부친 아하스와는 약 11년의 차이가 난다. 아하스는 20세에 왕이 되었고 예루살렘을 16년간 치리한다.(대하 28:1) 그리고 그가 죽고 나서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뒤를 이어 왕이 된다.(대하 28:27) 왕위에 오른 히스기야의 나이 는 25세였고 그는 그곳에서 29년을 통치하게 된다.(대하 29:1)
11세의 소년이(당시 아하스) 결혼하여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무리라고 볼 수 있겠지만 성경에 더 이상의 기록은 없기 때문에 추측만 할 수 있다. 한국의 옛 모습에도 손(孫)이 귀한 가문의 아들이 만 4~5세가 되어서 장가를 드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보통 사춘기를 겪으면서 자녀를 갖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던 시절이다. 또 논리적으로 본다면 아하스가 죽고 난 후 몇 년 후에 히스기야가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어디까지나 이 두 가지 관점은 작금의 문화에서 볼 수 있는 추측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히스기야이다.
성경으로만 풀어보자. 히스기야가 25세에 왕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20세에 왕이 되어서 3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 했다. 보통 어린 시절은 5살 때부터 어렴풋이 기억을 한다. 이로 보아 히스기야는 그의 부친 아하스 16세 때부터 기억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때는 그의 선조 요담 왕이 통치하고 있었을 때였고, 어렴풋이 선조의 기억이 그에게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 시기가 요담 왕 통치 말기였지만 요담 왕은 산당을 제거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는 늘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멈추지 않는 왕이었다. 성경은 선조 요담 왕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요담은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신실하게 행동했으므로 점점 강해졌습니다.'(대하 27:6, 우리말성경)
히스기야에게 어린 시절 이 기억들은 자신의 삶을 결정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그의 할아버지인 요담 왕의 업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았고, 들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뒤를 잇는 아버지가 왕이 되었을 때 왕국이 무너지고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도 보았다. 그의 아버지는 왕국을 구하기 위해 앗시리 왕(앗수르)에게 다마스쿠스(다메섹)에서 시리아(암모)를 쫓아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일로 유다는 앗시리아의 속국이 된다. 하지만 부친 아하스왕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패망한 시리아(암몬)의 신전의 신들과 제단을 왕국으로 가져온 것이다. "시리아(암몬) 왕들이 섬긴 신들이 그 왕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면, 그 신들이 나를 돕겠지"(대하 28:23, 새번역) 이런 생각과 가르침이 누구에게 흘러갔겠는가. 분명 그의 아들 히스기야에게 까지 흘러갔을 것이다.
패망한 나라를 지켜주지 못한 신과 그의 할아버지 요담 왕의 부흥기를 비교해볼 때에 죄는 상황을 왜곡시키는 힘이 있다. 어렴풋이 추정해볼 수 있지만 죄는 상황을 왜곡시킨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영화 <터널>에서 시사해준 바가 있다. 터널이 붕괴되어 인명구조하기 위해 인근 터널 공사를 중단시킨다. - 연쇄적인 붕괴의 위험 때문에 - 하지만 사람들은 본질 보다는 이익에 앞서 인근 터널 공사를 재개한다. 영화의 과한 설정이었지만 본질을 왜곡시키는 정부와 정치 그리고 사회의 모습을 고발한 영화다.
사회는 서비스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향해 최대의 서비스를 요구하지만 실상 직종의 사람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는 보고 있다. 권리를 누리는 사람들을 위해 그 권리를 충족시키는 업계의 권익은 어디에도 없다. 다들 그려려니 한다. 직업윤리와 서비스라는 측면과 정당한 대가성에 따른 보상을 이야기만 할 뿐 그들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처럼 죄는 나와 공동체 그리고 사회의 우선적인 이익에만 연결을 시킨다. 상황을 본질로 보지 않게 하고 당연한 권리를 찾으라고 부추긴다. 뉴스도, 매체도, 사람들도, 교회도 마찬가지다.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 25세였고, 젊은 나이에 왕이 되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의 부친도 그랬고 그의 선조도 그랬었다. 그러나 히스기야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무너지고 쓰러진 왕국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는 먼저 야훼의 성전 문을 열고 수리를 시작한다.
'그는 왕이 되던 그 첫 해 첫째 달에, 닫혔던 주님의 성전 문들을 다시 열고 수리하였다.'(대하 29:1, 새번역)
이 성전문은 그의 부친 아하스가 막아버렸고 훼손시킨 문들이다.(대하 28:24) 또한 자기를 구원해준 앗시리아(앗수르)의 왕에게 잘 보이려고 헐었던 출입로다.(왕하 16:18)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가는 것을 닫아버린 문이다. 이것을 히스기야가 다시 복원하고 있다. 역사적 가치를 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백성들을 연결시켜주는 성전은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상징이고 의미였으며 삶이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성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성전은 단지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명에 의해 7년 동안 지었던 화려한 건물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집트(애굽)에서 구하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 앞에서 여러 왕들 쫓아내시고, 광야에서 지키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거하시는 곳이다. 그것을 부친 아하스 왕이 닫았고 히스기야가 다시 열었다.
사람들은 흔히 수가 성(우물가의 여인)의 여인과 예수님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예배할 곳은 교회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그곳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인터넷 등에서 자주 본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 사람들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요 4:21-24, 새번역)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우물곁에서 한 여인을 만나신다. - 요한복음, 예수님과 수가 성 여인의 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는 산과 사마리아성의 이주 정책을 이해해야 한다. 각설. - 여인은 이곳에서 예수님께 질문을 한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요 4:20, 새번역) 풀어서 보자면 '예배를 드리는 곳이 어디입니까?' 이다. 그러나 여인이 말한 이 산은 사마리아에 위치한 그리심 산이다. 이곳은 야훼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여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에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는 장소 즉 축복을 선포하는 그리심 산이었고, 수가 성 여인이 가리킨 산이었다.
사마리아는 혼혈 유대인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쉽게 이해하자면 지금의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역감정처럼, 유색인종에 대한 백인의 우월논란처럼, 흙수저와 금수저의 차별논란처럼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그리심 산은 보호막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갈 때마다 그리심 산을 보면서 정당성의 논란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논란의 종지부를 찍듯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한글개역)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요 4:23)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교회의 건물 즉 보이는 교회를 부정하게 되면 우리는 논란과 다툼 그리고 차별로 인하여 저마다의 정당성만 주장하게 된다. 반대로 교회의 건물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부인하게 만드는 결과를 도출하게 된다. 개인적인 견해로 보자면 보이는 교회가 중요하듯이 그 교회에서 행함과 진실로 예배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그렇게 예배드린 성도들이 가정과 사회, 공동체에서 모이고 예배할 때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할 것이다. 각설.
'그는 산당을 헐어 버렸고, 돌기둥들을('돌기둥의 우상'-타번역) 부수었으며, 아세라 목상을 찍어 버렸다. 그는 또한 모세가 만든 구리 뱀도 산산조각으로 깨뜨려 버렸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때까지도 느후스단이라고 부르는 그 구리 뱀에게 분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왕하 18:4, 새번역)
히스기야는 산당과 돌기둥으로 만든 우상을 깨버리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모세가 만든 구리 뱀(놋 뱀)도 산산조각 냈다.(민 21:1-10) 이 구리 뱀은 모세 때부터 보존되어 오던 것으로 광야의 역사를 보여주는 한 대목이고 모세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역사이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주저 없이 이 구리 뱀(놋 뱀)을 산산 조각을 낸다. 산당과 돌기둥으로 만든 우상, 아세라 목상과 구리 뱀의 형상을 백성들이 분향하고 신(神)으로 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들 놓치는 부분이 구리 뱀이다. 여기서 나는 산당, 돌기둥 우상, 목(木)상 까지만 이해하고 구리 뱀에 대해서는 넘어간다. 그 뜻을 이해하지 않는다. 이해가 안 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고 그 분의 뜻에 따라야 한다면 이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역사적인 가치와 종교적인 가치가 있는, 그것도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만든 구리 뱀에 대해 히스기야는 망설임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우상이 되었고 하나님과 백성들을 갈라놓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 교회였다면, 나였다면, 생각에 생각을 하고, 고민에 고민을 하고, 회의와 토론을 하고 결국은 보존시키려고 할 것이다. 히스기야에게는 일고(一考)의 가치가 없었다. 구리 뱀을 백성이 신으로 분향하는 것 자체가 죄이며 그것을 용납해주는 것도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교회는 전통과 역사를 마치 우상처럼 섬기는 듯하다. 하나님보다 사업에 더 많은 관심을 갖으며, 복음과 영혼 구원보다 행사에 치중을 한다. 그리고 기념이 되는 것은 치적을 세우고 기록한다. 히스기야는 구리 뱀을 산산조각 냈다. 그리고 교회는 조각 난 구리 뱀을 모으고 있다. 이 사실이 슬프다.
내가 가장 고민하면서도 조심스럽게 경계하는 것이 '성'(聖)이다. '성직자'(聖職者), '성지'(聖地), '성전'(聖殿), '성도'(聖徒), '성가대'(聖歌隊) 등 이런 표현 문구가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우리는 잘못을 걷고 있다. 한국의 많은 목회자들이 그 스스로 성직의 길을 더럽히고 있다. 육신의 정욕을 사랑하고 안목의 정욕에 이끌리며 이생의 자랑에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뉴스는 그들을 성직자로 표현한다. 이미 타락한 성직자는 더 이상 성직자가 아니다. 교회는 100주년 기념을 맞으면서 양화진에 '외국인선교사묘원'을 가꾸었다. 실로 바람직하고 늦었지만 후대 기독교인들을 위해서도 좋은 사업이다. 그러나 그곳을 여전히 '성지'로 부른다. 사실 이 땅위에서의 성지는 없다. 우리가 성지순례로 이스라엘 여행을 가지만 기독교 역사를 탐방하는 수준으로 보는 것이 맞다. 그렇다고 그곳이 은혜가 없겠는가. 꼭 성지라는 표현을 해야만 은혜가 되겠는가. 사실 역사적 장소가 불분명 한 것이 은혜인 것이다. 만일 정확한 장소와 당시의 문헌대로 복원하려 한다면 그 장소는 우상이 되고 만다. 성가대는 어떤 곳인가? 사실 80년대만 해도 성가대는 예배 순서에서 설교 전 찬양을 담당하는 것이 전부였다. 헌금송은 가족이나 기관이 또는 은혜 받은 성도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했었던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문화와 경제의 발전에 교회가 편승 하면서 성가대는 예배에 없어서는 안 될 위치에 와 있다. 과거에 시간을 쪼개어 봉사와 헌신을 하셨던 분들을 작금의 성가대와 비교한다면 이미 성가대(다른 교단에서는 '찬양대'로 부름)는 타락에 노출되어 있다. 일례로 성가대가 예산 없이는 운영이 안 된다는 사실이 입증해주고 있다. 어떤 이는 여기에 대해 반문하겠지만 예산의 규모와 정도를 살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교회가 커질수록 예산의 할애를 많이 하는 기관 중 하나가 성가대이다. 이제는 성가대를 지원하기 위해 교회는 예산을 많이 편성해야 한다. 그래야 더 좋은 찬양을 위해 오케스트라를 섭외하고 성악을 전공하는 사람들로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그 순수성은 이미 바래지고 있다. 성도(聖徒) 역시 거룩한 길을 걷는 신자를 표현하는 말이다. 나의 삶은(우리) 성경이 말하는 거룩과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이 표현이 얼마나 부끄럽고 민망한지를 본다. 거룩한 사람이 교통 법규를 무시하고 무단횡단하며 과속을 일삼는다.(바쁘고 다들 그렇게 하니까) 거짓말이 들통 날 때는 장난스럽게 넘어가며 조크(joke)라고 말을 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조금씩 늦는 것이 통념이 되었고 시간을 지키는 것은 할 일이 없어서 시간이 남아도는 한심함 또는 멍청함으로 비춰진다. 이 뿐만 인가 교회에서는 인정받지 못할 때마다 분노하고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으려고만 한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나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교회가 나를 위해 해주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검토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을 한다. '도대체 헌금이 얼마나 모이는데 이것 밖에 안 되는 거야? 안되겠어. 오늘 장로님께 이 부분에 대해서 말씀드려야지. 다른 교회를 보라구.'
거룩함이 나를 망치고 있는가? 아니다 거룩함이 나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거룩함의 의미를 더럽히고 있다. 각설.
히스기야를 볼 때 문제의 핵심과 본질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 스스로가 움직일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길을 열어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히스기야는 먼저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결정한다. 성경은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다고 증언한다.(왕하 18:5) 그리고 그는 야훼께 연합하여 그를 떠나지 않았다. 타 번역에서는 '주님에게만 매달려', '야훼를 배반하지 아니하고 충성을 다하여', '모든 일에 여호와를 따르며 순종하고' 번역되어 있다. 그는 모세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켰다.(왕하 18:6) 그는 그 선친 아하스가 스스로 속국을 칭하고 섬기던 앗시리아 왕에게 반기를 들고 그를 섬기지 않기로 결정했다.(왕하 18:7b)
이것을 반추해 본다면 히스기야는 그의 선조 웃시야 왕 처럼 야훼를 경외하기를 멈추지 않기 위해 그 주변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두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따르고 순종할 때 순간순간 마음이 흐트러진다. 이것을 지적해주고 간언해주는 충성스러운 누군가가 곁에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은 히스기야 왕에 대해 이렇게 증언을 한다.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왕하 18:7a, 한글개역)
히스기야 4년에 (북)이스라엘 사마리아는 앗시리아(앗수르)에게 포위당한다.(왕하 18:9) 그리고 3년 후인 히스기야 6년에 사마리아는 함락이 된다.(왕하 18:10). 이때가 (북)이스라엘 호세아 왕 9년이었다. 그리고 그 앗시리아는 (남)유다를 정복하기 위해 나선다. 자기의 선친은 앗시리아에게 굴복하고 하나님 대신 앗시리아와 다른 신들을 섬겼지만 히스기야는 앗시리왕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기를 결정한 사람이었다. 히스기야 14년에 앗시리아 왕 산헤립이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취하게 된다.(왕하 18:13) 이때 히스기야는 앗시리아 왕 산헤립에게 굴복하고 만다. 그는 산헤립 왕이 요구한 은 300 달란트와 금 30 달란트를 주고 야훼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내주었다. 이 뿐만 아니라 야훼의 전 문의 금과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서 산헤립 왕에게 바친다.(왕하 18:13-16) 히스기야 왕은 산헤립이 군대를 거두어 물러가기를 바라고 있었다.(왕하 18:14,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그럼에도 앗시리아 왕 산헤립은 다르단과 랍사리스와 랍사게에게 대군을 위임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공격을 감행한다. 실로 굴욕이었다. 이보다 더한 굴욕이 어디 있을까?
분명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정했고 히스기야의 행실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범사에 형통함을 주셨다.(왕하 18:7) 그러나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의 창과 칼을 (남)유다와 히스기야에게로 향했다. 히스기야의 항복에도 앗시리아 대군은 예루살렘을 집어 삼킬 기세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이렇게 절규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정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살기로 결정했을 때 나에게 찾아오는 어려움과 예기치 못한 상황들로 힘들어할 때가 많았다. 도리어 그 일로 나는 더욱 분노하고 상황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을 본다. 힘든 시간들이 길어질 때 '하나님 당신한테 잘 못이 없어요. 다 제 탓이고 제 잘못입니다. 그런데 너무 힘들어요. 전 정말 이것 밖에 안 되는 거죠?' 이렇게 숨죽이며 기도를 한다. 그러나 성경은 변함없는 충성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가르친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겠느냐고 질문한다. 그럴 때마다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상황 앞에서 내 고백은 무너진다.
이런 굴욕적인 상황에서 히스기야는 흔들리지 않았다. 산헤립이 진군하여 쳐들어올 때 그에게 은과 금을 바치며 산헤립 왕에게 철수를 요구했지만 산헤립 왕은 대군을 이끌고 히스기야와 유다백성 사이를 이간질 한다.(열왕기하 18장13-35)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담담했다. 유다의 성읍들이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한 군대는 동족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포로로 끌고 간 나라의 대군이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백성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그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말라는 왕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왕하 18:36, 새번역)
한 나라의 지도자를 통해 그 나라의 백성을 볼 수 있다. 하나님 앞에 타락하며 살던 백성들이었지만 왕이 하나님 앞에 겸비하여 그 말씀을 순종할 때(=하나님 경외하기를 살아갈 때) 백성들도 그것을 따르게 된다. 히스기야가 왕이 된 첫째 달에 닫혔던 성전 문들을 다시 열고 수리를 하였다.(대하 29:3). 그리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성전 동쪽 뜰에 모으고 그들을 독려하기 시작한다.
"레위 사람들은 나의 말을 잘 들으시오. 이제 그대들 자신을 먼저 성결하게 하고, 또 그대들의 조상이 섬긴 주 하나님의 성전을 성결하게 하여,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말끔히 없애도록 하시오. 우리의 조상이 죄를 지어, 주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을 하였소.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얼굴을 돌이켜서, 주님께서 거하시는 성소를 등지고 말았소. 그뿐만 아니라, 성전으로 드나드는 현관 앞문들을 닫아걸고, 등불도 끄고, 분향도 하지 않고, 성소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지도 않았소. 이러한 까닭으로, 주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 진노하셔서, 우리를 두려움과 놀람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셨다는 것은, 여러분이 직접 보아서 알고 있는 사실이오. 조상들이 칼에 맞아 죽고, 우리의 자식들과 아내들이 사로잡혀 갔소. 이제 나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 맹렬한 진노를 우리에게서 거두시기를 바라며,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기로 결심하였소. 여러분,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하시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선택하셔서, 주님께 분향하게 하시고, 백성을 인도하여 주님께 예배드리게 하셨소."(대하 29:5-11, 새번역)
왕의 이런 결단 앞에 레위 사람들이 뜻을 함께 했고(대하 29:12), 제사장들은 성전을 성결케 하는 일에 전심을 다했다.(대하 29:16) 죄를 범할 때에 버린 모든 기구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으면서 다시 봉헌하기 시작했다.(대하 29:19) 성전이 성결케 되었을 때 히스기야는 대신들을 불러 모아 함께 성전으로 올라갔다. 이는 그의 선조 요담 왕과는 대조적이다. 요담 왕은 그의 부친 웃시야가 성전에 직접 분향하기 위해 들어갈 때 간언하는 제사장들에게 분노한 이유로 문둥병이 걸린 것을 보았다. 이 일로 인해 요담 왕은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성결케 된 성전에 신하들과 함께 들어간다. 그곳에서 속죄제물을 드리고, 레위 사람들로 하여금 심벌즈와 비파와 수금을 손에 들고 성전에 있도록 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선견자 갓과 나단 선지자를 시켜서 다윗 왕에게 명령한 것이다.(왕하 29:25). 히스기야가 번제를 제단에 드리라고 명령했을 때 찬양과 나팔 소리가 함께 울렸다. 성경은 '온 회중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고 증언한다.(왕하 29:28) 제사를 마친 후 왕과 온 회중은 다 엎드려 경배했다.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몸을 굽혀 경배했다.(왕하 29:29-30) 전에 죄에 있었던 왕과 백성들이 이제는 구별된 백성이 되었다. 즉 성도(聖徒)가 되었다.
성도의 삶은 바로 회개에서 시작이 된다. 성도는 회개를 통해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그 행위를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이다. 그들이 거룩한 삶으로 들어갈 때 레위 사람들의 찬양 소리에 즐거워하고 몸을 굽혀 경배하는 것을 본다. 나는 예배를 드릴 때 찬양을 들으면서 또는 찬양을 하면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가? 하나님을 기뻐하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가슴을 치며 내 행위를 돌이키는가? 성도의 삶은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죄를 가벼이 보지 않으며, 행실을 바르게 하고, 세상이 주는 유익과 죄의 모습들을 거절한다. 예배에 참석하는 나는 찬양을 들을 때나 찬양을 할 때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다. 어느새 스마트폰을 보며 시간을 확인한다. 순서지를 보면서 예배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체크한다. 나는 예배자가 아니었다. 나는 성도가 아니었다. 나는 방관자였다. '히스기야가 나서서 "이제 제사장들이 몸을 깨끗하게 하여서, 주님께 거룩하게 구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가까이 나아와, 제물과 감사제물을 주님의 성전으로 가지고 오십시오" 하고 선포하니, 드디어 회중이 제물과 감사제물을 가져 왔다. 더러는 그들의 마음에 내키는 대로 번제물을 가져 오기도 하였다.'(대하 29:31, 새번역)
성도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을 기뻐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야 말로 큰 은혜로 여긴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의 태도는 다른 사람을 대하는 대토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쁨으로 드릴 때 다른 사람에게 기쁨과 정성으로 대한다. 작금의 교회는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 헌금과 헌물을 드리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한다. 그것은 구약의 방식이라고 말을 한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 공신력 있는 기관도 십일조와 헌금에 대한 경각심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소득의 십분의 일을 통해 제사장과 그 가족 그리고 레위 사람들과 그 가족을 먹이시는 것을 본다면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와 헌금은 과거의 모습으로 보기에 설득력이 약하다. 오히려 그것을 관리하고 사용해야 하는 기관의 잘못과 죄의 틈새를 바라보고 개선해야하지 않을까? 모 교회에서는 목회자의 아내가 해외여행 경비를 교회 법인카드로 결제를 한 것이 외부감사를 통해 드러났는데 그 금액이 기천만 원 상당이었다. 그런데도 교회는 이 사실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교단은 아예 침묵을 한다. - 만일 외부 감사가 없었더라면 이 일은 덮어졌을 것이다. - 교회의 헌금으로 교역자와 그 가족이 살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가계를 꾸리는 마지노선에서 필요 부분을 책정하고 사회와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법을 지도자들이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성도들도 그것을 따르게 된다. 입에 발린 논리 정연한 어휘는 듣는 순간 사람들에게 인정 받을 수 있겠지만 딱 거기까지다. 시간이 지나면 조롱과 비웃음만 살 뿐이다.
히스기야 왕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독려하고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 나오도록 했을 때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그리고 백성들이 히스기야의 현란한 웅변에 넘어갔다고 보는가? 그렇지 않다. - 그런 것은 시간이 지나면 그 진위(眞僞)가 나타나기에 - 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도 설교를 듣고 나면 설교자의 본심이 신앙에 근거한 것인지 세상에 근거한 것인지를 안다고 한다.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결정했을 때 마음에만 머무르는 결정이 아니었다. 그의 삶이 그 결정에 따르고 있었다. 교회가 더 이상 개혁하기를 주저하고 현실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 끝은 이미 와있다고 봐야 한다. 지도자들은 깨어 근신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한다. 말씀을 청종해야 한다.
나와 당신이 주목하지 않는 구절을 이제는 힘 있게 읽어보아야 한다.
'이 일이 갑자기 되었을 찌라도 하나님이 백성을 위하여 예비하셨음을 인하여 히스기야가 백성으로 더불어 기뻐하였더라 '(대하 29:36, 한글개역)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개인의 신앙이 용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 여기서 말하는 개인의 신앙이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이다. -
'회중이 가져 온 번제물의 수는, 수소가 칠십 마리, 숫양이 백 마리, 어린 양이 이백 마리였다. 이것은 다 주님께 번제물로 드리는 것이었다. 번제물과는 달리 구별하여 드린 제물은, 소가 육백 마리, 양이 삼천 마리였다. 그런데 번제로 바칠 짐승을 다 잡아 가죽을 벗기기에는 제사장의 수가 너무 모자라서, 이 일을 끝낼 때까지, 성결 예식을 마친 제사장들이 보강될 때까지, 제사장들의 친족인 레위 사람들이 제물 잡는 일을 거들었다. 사실, 자신들의 성결을 지키는 일에는, 제사장들보다는 레위 사람들이 더욱 성실하였다. 제사장들은, 제물을 다 태워 바치는 번제물도 바쳐야 할 뿐 아니라, 이 밖에도 화목제물로 바치는 기름기도 태워 바쳐야 하였다. 번제와 함께 드리는, 부어 드리는 제사도 제사장들이 맡아서 하였다. 이렇게 하여, 주님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이 다시 시작되었다.'(대하 29:32-35, 새번역)
번제물 : 수소 70마리, 숫양 100 마리, 어린 양 200 마리이다. 구별하여 드리는 제물 : 소 600 마리, 양 3,000 마리
이렇게 많은 양의 제물을 그들이 선뜻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은혜가 있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제물을 잡고 가죽을 벗기는데 제사장의 수가 너무 부족했다. 이 일을 위해 제사장들은 성결의 의식으로 자신을 정결케 해야 했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다. 그런데 레위 사람들이 이 일을 거들기 위해 나선다. 성경은 제사장 보다 레위 사람들이 자신들을 성결을 지키는 일에 더욱 성실했다고 증언한다. 레위 사람들이 자신들을 성결 시키는 일에 성실했던 이유는 히스기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스스로를 성결케 하고, 성전을 성결케 하여, 하나님을 섬기라고 격려했다.(대하 29:4-19) 이때 레위 사람들은 왕의 명대로 자신과 성전을 성결케 했다.(대하 29:12, 15)
어쩌면 한국 교회 지도자들에게 경고의 말씀은 아닐까? 히스기야는 분명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불러 보아 “이제 그대들 자신을 먼저 성결하게 하고, 또 그대들의 조상이 섬긴 주 하나님의 성전을 성결하게 하여,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말끔히 없애도록 하시오”(대하 29:5, 새번역) 라고 독려했다. 왕의 명령 앞에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 모두 성전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노력을 다한다.(대하 29:15-16) 하지만 성결 예식으로 스스로를 깨끗케 한 사람들은 레위 사람들이었다. ‘레위 사람들이 나서니~, 이들이 동료 레위 사람들을 모아 성결 예식을 하고,’(대하 29:12-15a) 이제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말씀 앞에서 돌이켜야 한다.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아닌 교회의 섬기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씀 앞에서 인정하게 된다.
이 말씀이(대하 29:32-35) 나에게 그리고 한국교회에게 위안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세벨(아합 왕의 왕비)이 야훼의 선지자를 죽였을 때 오바댜를 통해 100명을 남겨두셨다.(왕상 18:4) 또한 엘리야가 주를 섬기는 사람이 자기밖에 없다고 토로할 때(왕상 19:10,14)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남기시겠다고 하셨다.(왕상 19:18) 소망이 없어 보이던 시대에 호세아 선지자를 일으켰으며, 산헤립의 침략 앞에 속수무책 무너져 내려가던 히스기야에게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신다. 종교가 정치와 결탁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타락해진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요한을 일으키셔서 메시야가 오는 길을 예비케 하셨다. 이처럼 소망이 없어 보이는 곳에 하나님께서는 소망을 여셨으며 논리와 지식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곳에 하나님은 거기 계셨다.
내 표현을 빌자면 작금의 한국 교회가 그 끝을 달리고 있는 것을 본다. 교회의 지도자가 잘못을 행했는데도 그것을 덮고 감싸 안으면서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는 것을 볼 때 교회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며 우리의 치부를 감추는 부끄러운 행동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계시고, 계셨다고 증언한다. 하나님은 세상이 주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앞에 무릎 꿇지 아니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분명 남기셨다고 확신한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정치에 편승하여 부와 성공을 누릴 때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그 말씀 앞에 살아가기를 힘쓰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은 이 땅에 남기셨다. 이 사실을 교회의 지도자들만 모르는 것 같다.
히스기야와 그의 신하들은 둘째 달에 유월절을 지키기로 결정을 한다. 원래 유월절은 첫 달 14일이다. 그러나 유월절을 지키기에(예식을 행하는 것) 제사장들이 부족했고, 백성도 예루살렘에 많이 모이지 못한 상황이었다. - 성경이 숫자에 집중하지 않음을 보라 -
'왕이 대신들과 예루살렘의 온 회중과 더불어 의논하여, 둘째 달에 유월절을 지키기로 한 것이다. 이처럼 유월절을 한 달이나 늦추어 지키기로 한 것은, 성결 예식을 치른 제사장도 부족한데다가, 백성도 예루살렘에 많이 모이지 못하였으므로, 본래 정해진 첫째 달에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왕과 온 회중이 이 계획을 좋게 여겼으므로, 왕은 브엘세바에서 단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전역에 명령을 선포하여, 모두 함께 예루살렘으로 와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유월절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들은 참으로 오랫동안, 율법에 기록된 절차대로 유월절을 지키는 것을 실천하지 못했던 것이다.'(대하 30:2-5, 새번역)
유월절 예식을 하기엔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한 제사장들'(우리말성경)이 부족했다. 그리고 백성들도 많이 모이지 못한 상황이다. 왕과 신하들은 한 달을 미루고 제사장들을 성결케 한다. 그리고 유월절 참석을 독려하기 위해 사람들을 곳곳에 보내 이 사실을 전한다.
'"이스라엘 자손은 들으라, 백성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돌보신 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러면 주님께서도 남아 있는 백성들, 곧 앗시리아 왕의 손에서 벗어난 당신들에게로 돌아오실 것이다. 당신들은 조상이나 동포를 닮지 말아라. 그들이 주 조상의 하나님께 범죄하였으므로, 주님께서 그들을 멸망하도록 버려두신 것을, 당신들은 직접 보았다. 당신들은 목이 곧은 조상과 같이 고집을 부리지 말고, 주님께로 돌아오라. 당신들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룩하게 하신 성전으로 들어가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섬겨라. 그래야만 주님께서 당신들에게서 진노를 거두실 것이다. 당신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면, 당신들의 친족과 아이들을 사로잡아 간 자들이 당신들의 동포에게 자비를 베풀어서, 그들을 이 땅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시므로, 당신들이 그에게로 돌아오기만 하면, 당신들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다."'(대하 30:6-9, 새번역)
이 선포의 내용은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각설하고 두 가지만 본다면, 목을 곧게 하지 말고 하나님께 돌아오라.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소망은 피어난다. 이 독려문에 대해 무너진 성읍에 남겨진 - 포로로 끌려가지 못한 북이스라엘 동족들. 당시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대부분이 지식층이었다. - (북)이스라엘 동족들에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다.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여러 성들을 다녀 스불론까지 이르렀지만 백성들은 전하는 사람들을 조롱하며 비웃었다. 그러나 아셀, 므낫세, 스불론의 몇몇 사람들은 겸손해져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대하 30:10-11)
같은 소식을 같은 시간에 들어도 어떤 이는 조롱하고 어떤 이는 겸손해진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나타났다. 예수님 곁에 함께 달린 두 행악자는 예수님을 향하여 욕을 했지만,(마 27:44, 막 15:32) 한 행악자는 다른 행악자를 꾸짖고 예수님께 마음을 내려놓는다.(눅 23:39-43) 말씀을 대하는 나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말씀을 듣고 돌이켜 회개하지만, 내 마음이 닫혀있을 때 말씀을 밀어내는 내 자신을 바라본다. 교회에서도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한 사람은 그 말씀 앞에 가슴을 치며 후회를 하고 돌이키는데 또 다른 사람은 목을 곧게 하여 반문을 하며 납득이 안 되는 것을 조목조목 되새김질한다. 내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있다면 예배는 나에게 있어서 회복의 시간이고 하나님을 향한 기쁨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나는 그러지 못했었다.
주의 깊게 보아야 하는 것은 3절에 '백성도 예루살렘에 많이 모이지 못하였으므로'라고 나와 있다. 그리고 곳곳에 사람들을 보내어 유월절을 지킬 것을 독려하지만 몇몇 사람들만이 겸손함으로 유월절에 참여한다.
나부터가 숫자에 연연해하는 것을 본다. 교회 역시 이 숫자 앞에 자유롭지 못하고 있다. 분명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부족했지만 '그것을 준비하는 마음이 더욱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나?' 이런 질문을 해본다. 그러나 숫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소수의 겸손한 사람들이었고, 한 마음으로 유월절을 준비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소수의 사람들의 겸손함을 받으셨고, 왕과 대신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전한 명령을 유다 백성들에게 한 마음으로 따르도록 감동을 주셨다. 그리고 기적은 일어났다.
'다만 아셀과 므낫세와 스불론 사람들 가운데서, 몇몇 사람이 겸손하게 말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왔다. 하나님이 또한, 유다에서도 역사하셔서, 왕과 대신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전한 그 명령을 유다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따르도록 감동시키셨다. 둘째 달에 백성이 무교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그 수가 심히 많아서 큰 무리를 이루었다.'(대하 30:11-13, 새번역)
히스기야 왕과 대신들이 곳곳에 보낸 독려문을 통해 소수의 동족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찾아왔다. 숫자에 대해 왕과 대신들 그리고 유다인들이 실망하거나 자책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셨고 감동을 주셨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달 백성이 무교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모이게 된다. 성경은 '그 수가 심히 많아서 큰 무리를 이루었다'고 되어 있다. 몇몇 겸손한 (북)이스라엘 동족이 왔을 때 나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마음으로는 '그럴 수 있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라고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과 대신들 그리고 유다 백성들에게는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처럼 성경은 능력 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 무리의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께 돌아오는 한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다.
지금 교회는 이벤트에 목말라 하고 있다. 물론 연예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섬기고 살아가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이것은 연예인들뿐만 아니라 세상 모두가 그렇게 되어야 하는 일이다. 교회에서는 행사성 이벤트를 통해 그 수를 늘리려고 노력을 한다. 이벤트는 말 그대로 이벤트다. 이벤트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 만약 이벤트로 교회가 성장했다면 한국은 기독교 국가가 되어 있어야 하고, 세계 복음화는 시간문제일 것이다. - 여기에는 시간과 장소와 그 외적인 요소의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유명인을 초청하게 되면 강사비나 섭외비 명목의 지출이 과도하게 이루어지게 되고 만만찮게 식비는 책정해야 한다. 이벤트성이 커질수록 이벤트에 초대한 사람들의 선물도 생각해야 한다. 교회는 이를 위해 홍보를 대대적으로 펼친다. 멋진 조명과 방송국 버금가는 음향시설이 받쳐준다. 관객도 많이 동원이 되어 이미 만석을 이룬다. 그리고 거기까지다. 동기는 나쁘지 않다. 어떻게 하든 교회로 사람들을 끌어 모아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이벤트를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 하지만 여기에 숫자의 논리가 포함된다는 것을 교회의 지도자들은 알면서도 모르쇠 한다.
내가 겸비하여 하나님께 돌이킬 때 하나님은 감동을 주신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갈 때 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 내가 하나님만으로 만족함을 얻을 때 하나님은 거기 계시다.
유월절은 성대하게 치러지고 있다. 유월절에 참석한 사람들은 율법의 규례에 따라 성결 예식을 치르고 유월절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러나 에브라임, 므낫세, 잇사갈, 스불론에서 온 많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신을 거룩하게 하지 않고 유월절 양을 먹어서 규례를 어기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이 일로 인해 히스기야는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
'그러나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잇사갈과 스불론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깨끗하게 하지 않은 채로 유월절 양을 먹어서, 기록된 규례를 어겼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그들을 두고 기도하였다. "선하신 주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비록 그들이 성소의 성결예식대로 스스로 깨끗하게 하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곧 조상 때부터 섬긴 주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를 드렸으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의 아픈 마음을 고쳐 주셨다.'(대하 30:18-20, 새번역)
히스기야는 기도를 보면 규례를 어긴 동족들을 향해 비난하거나 잘못을 들추어 내지 않는다. 유다 백성들 역시 그들의 잘못에 대해 책잡지 않았다. 왕의 기도는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잇사갈과 스불론에서 온 많은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해 줄 것을 간정하면서 그들의 진정성을 하나님께 아뢰고 있다. '선하신 주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이 마음을 다하여~ 정성껏 예배를 드렸습니다.' 히스기야는 그들의 잘못을 덮어주고 있다. 하나님도 모르셨을까?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비록 규례를 어겼지만 마음을 다하고 정성껏 예배를 드린 것을 알고 계신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용납하여 화평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의 아픈 마음을 고쳐 주셨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벧전 4:8, 새번역)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약 3:17-18, 개역한글)
나도 누군가의 기도를 통해 용서함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 때론 대표 기도를 들을 때 또는 목사님의 기도를 통해 내 자신이 용납 받는 것을 발견한다. 누군가의 용납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고 하나님이 고쳐주시는데, 나는 다른 사람을 용납하기 보다는 그의 결점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형제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을 본다면 그들의 잘못을 내가 감싸야 한다. 그러지 못한 나는 참 이기적이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한글개역)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7일 동안 온전히 지킨 유월절을 통해 백성들은 새롭게 되었고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7일 동안 기쁨에 넘쳤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또한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잘 알고 행동하는 모든 레위 사람들을 격려해주었다.(대하 30:22) - 히스기야 왕의 지도력 - 온 무리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다시 7일을 더 지키기로 한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기쁨이 있었다. 히스기야 왕은 유월절을 지키러 온 무리들을 위해 수송아지 1,000마리, 양 7,000마리를 주었고 신하들도 수송아지 1,000마리와 양 1만 마리를 주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을 거룩하게 한 제사장들의 수도 많아졌다.'(대하 30:24b)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유다의 온 이스라엘 무리들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이스라엘에서 모인 모든 사람들과 또 이스라엘에 와 있는 이방 사람들과 유다에 살고 있던 사람들과 함께 기뻐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시대로부터 이런 일은 예루살렘에 없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백성들을 축복하기 위해 섰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소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들의 기도가 하늘, 곧 그 거룩한 곳까지 미쳤습니다.'(대하 30:25-27, 우리말성경)
부흥이 일어날 때 인간의 논리와 한계를 벗어난다. (북)이스라엘은 멸망했고 앗시리아(앗수르)에 포로로 많은 귀족과 지식인층이 끌려갔다. (남)유다는 여전히 어려운 가운데 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부흥시키는지를 성경은 보여 준다. 한 사람의 결정과 하나님 앞에 바른 삶을 살아갈 때 주변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진다. 인간적으로 볼 때 어렵고 힘든 상황이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예비하셨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겸손케 하셨다. 감동을 주셔서 한 마음으로 따르게 하셨고 절기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키셨다. 유월절은 기대 이상으로 큰 기쁨의 잔치가 되었다. 백성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더욱 더 찬양했다. 히스기야와 그 신하들은 백성들을 위해 자신들의 소와 양을 내놓았다. 이런 일은 솔로몬 시대부터 없었다고 기록한다. 또한 거룩해지고 성결케 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다. 그들의 기도는 거룩한 곳까지 미쳤다. 이 후로도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며 경외하는 삶을 살아간다.(대하 31장. 각설)
다시 열왕기서로 돌아가 보자. 산헤립의 군대에 맞선 백성들이 왜 이리도 차분하고 그들에게 동요되지 않았는지를 살펴보았다.(왕하 18:36) 백성들은 이 일에 대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말라는 왕의 명령을 받았다. 이미 그들은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랍사게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처럼 (남)유다도 멸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모든 일이 야훼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서 유다를 돕지 않는다고 강조를 한다. 그리고 야훼를 신뢰하지 못하도록 갖은 논리로 설득하고 있다. 엘리야김(왕궁 관리 대신)과 셉나(서기관)와 요아스(역사 기록관)가 히스기야 왕에게 전말을 고한다.
전말을 들은 히스기야 왕은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은 후 야훼의 성전으로 들어갔다. 엘리야김과 셉나는 나이 든 제사장들에게 굵은 베옷을 입혀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앗시리아의 부하들이 돌아갈 것과 그들이 자기 땅에서 칼에 맞아 죽을 것을 말씀하신다.(왕하 19:6-7) 그러나 산헤립은 다시 사람을 보내 히스기야 왕에게 '누구도 히스기야와 유다를 구원하지 못한다'고 협박을 한다.(왕하 19:10-13) 이 때 이 소식을 접한 히스기야 왕은 다시 성전으로 가서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 -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낙성식 한 후 기도한 것을 기억해 보라. 왕상 8:22-53, 특히 33-34절 -
"그룹들 위에 계시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님만이 이 세상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는 오직 한 분뿐인 하나님이시며,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주님,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십시오. 주님, 눈여겨보아 주십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을 전한 저 산헤립의 망언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 참으로 앗시리아의 왕들이 여러 나라와 그 땅을 마구 짓밟아 버렸습니다. 여러 민족이 믿는 신들을 모두 불에 던져 태웠습니다. 물론 그것들은 참 신이 아니라, 다만 나무와 돌로 만든 것이었기에, 앗시리아 왕들에게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마는, 주 우리의 하나님, 이제 그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셔서, 세상의 모든 나라가, 오직 주님만이 홀로 주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왕하 19:15-19, 새번역)
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임금님께서 앗시리아의 산헤립 왕의 일 때문에 주님께 올린 그 기도를 주님께서 들으셨다고 말씀하시면서, 앗시리아 왕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처녀 딸 시온이 오히려 너 산헤립을 경멸하고 비웃을 것이다. 딸 예루살렘이 오히려 물러나는 네 뒷모습을 보면서 머리를 흔들 것이다. 네가 감히 누구를 모욕하고 멸시하였느냐? 네가 누구에게 큰소리를 쳤느냐? 나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감히 네 눈을 부릅떴느냐? 네가 전령들을 보내어 나 주를 조롱하며 말하기를, 내가 수많은 병거를 몰아 높은 산 이 꼭대기에서 저 꼭대기까지 레바논의 막다른 곳까지 깊숙히 들어가서 키 큰 백향목과 아름다운 잣나무를 베어 버리고, 울창한 숲 속 깊숙히 들어가서 그 끝까지 들어갔고, 그리고는 땅을 파서 다른 나라의 물을 마시며, 발바닥으로 밟기만 하고서도 이집트의 모든 강물을 말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산헤립아,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그런 일은 이미 내가 오래 전에 결정한 것들이고, 이미 내가 아득한 옛날부터 계획한 것들이다. 이제 내가 그것을 이루었을 뿐이다. 그래서 네가 견고한 요새들을 돌무더기로 만들고, 여러 민족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공포에 질리게 하고, 부끄럽게 하였다. 민족들은 초목과 같고 자라기도 전에 말라 버리는 풀포기나 지붕 위의 잡초와 같았다. 나는 다 알고 있다. 네가 앉고 서는 것, 네가 나가고 들어오는 것, 네가 내게 분노를 품고 있다는 것도, 나는 모두 다 알고 있다. 네가 내게 품고 있는 분노와 오만을, 이미 오래 전에 내가 직접 들었기에, 내가 네 코에 쇠갈고리를 꿰고, 네 입에 재갈을 물려, 네가 왔던 그 길로 너를 되돌아가게 하겠다.
히스기야야, 너에게 증거를 보이겠다. 백성이 금년에 들에서 저절로 자라난 곡식을 먹고, 내년에도 들에서 저절로 자라난 곡식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내후년에는 백성이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둘 것이며, 포도밭을 가꾸어서 그 열매를 먹게 될 것이다. 유다 사람들 가운데서 환난을 피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이 다시 땅 아래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오고, 환난을 피한 사람들이 시온 산에서부터 나올 것이다. 나 주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룰 것이다.'
그러므로 앗시리아의 왕을 두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이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며, 이리로 활 한 번 쏴 보지도 못할 것이다. 방패를 앞세워 접근하지도 못하며, 성을 공격할 흙 언덕을 쌓지도 못할 것이다. 그는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이 도성 안으로는 결코 들어오지 못한다. 이것은 나 주의 말이다. 나는 내 명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 도성을 보호하여 구원하고, 내 종 다윗을 보아서라도 그렇게 하겠다.'"(왕하 19:20-34,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산헤립의 망언과 히스기야의 마음을 듣고 계셨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 분이시다.(시 121:4) 하나님은 산헤립의 조롱에 대해 분노하셨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히스기야 왕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대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산헤립의 마음을 알고 계셨다. 만군의 야훼 주 하나님은 다른 이방 신들처럼 잠자코 있지 않으신다. 이방 신들은 사람들이 만든 신이어서 말을 하거나 생각을 할 수 없을 뿐더러 힘과 권세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존하시며 무궁하신 분이시다. 그 지혜는 세상의 지혜자들이 측량할 수 없고 그의 능력은 세상의 권세자들이 대적할 수 없다. 그 하나님께서 사면이 에워싸인 히스기야를 향해 도우실 것을 말씀하셨다. 오히려 '처녀 딸 시온이 산헤립 경멸하고 비웃게 되고, 딸 예루살렘이 산헤립이 물러나는 것을 조롱한다'고 하셨다.(왕하 19:21) 산헤립의 의도는 히스기야와 백성들을 이간질을 하면서 하나님과 유다를 이간질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산헤립의 군대와 능력보다 크신 분이시다. 나는 가끔 산헤립의 능력 앞에 압도되어 그 능력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곤 한다.
작금의 기독교는 공격의 대상이 되었고 그 스스로의 죄로 인해 사람들로 하여금 혐오의 대상이 되게 하고 있다. 각종 사건이 터질 때마다 마음을 졸이고 교회를 비소하게 여기게 한다. 결국 나는 세상을 우월하게 보고 세상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비소하게 생각한다. 이것이 죄다.
죄는 하나님을 조롱하게 만든다. 죄는 하나님은 신들(gods) 중 하나일 뿐이라는 논리를 주입시킨다. 죄는 한 개인과 공동체를 넘어 하나님을 향하여 공격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주의 주인이시며 모든 생명의 창조주이시다. 죄는 그 분 앞에서 굴복하게 되고 조롱과 수치는 그것을 말하는 자들의 것이 된다. 수세기 동안 새벽에 이슬이 내리고 동 트기 전 없어지는 것처럼, 바다에 파도가 치고 파도로 바다의 진행이 바뀌는 것처럼 변함없는 하나님의 법칙은 늘 그렇게 우리 곁에 있었다. - 진화론이 아무리 훌륭한 논리일지라도 이슬과 파도가 진화되었다는 것은 밝힐 수 없다. -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더욱 더 신뢰해야 한다. 자기를 신뢰한 산헤립이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을 농락했듯이, 나를 신뢰할 때 나는 죄의 농락 앞에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날 밤에 야훼의 천사가 앗시리아 진영에서 18만 5천명을 죽인다.(왕하 19:35) 역대기서에서는 ‘주님께서 한 천사를 보내셔서 앗시리아 왕의 진영에 있는 모든 큰 용사와 지휘관과 장군을 다 죽여 버리셨다.’고 증언한다.(대하 32:21a, 새번역) 상황은 간단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주변의 나라를 멸망시킨, 기세등등한 산헤립의 군대가 간단히 정리가 되었다. 논리적으로 파헤칠 수 없는 이 말씀 앞에 또 다시 학자들은 풍토병이라든지 다른 것을 앞세워 논리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들이 논리적으로 어떻게 만들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변함이 없으시며 그분의 약속은 변개치 않으신다. 이 일로 산헤립은 진영을 철수하고 물러나게 된다.(왕하 19:36) 그리고 산헤립은 자신의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에게 죽임을 당한다.(왕하 19:37)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각설하겠다.
제3자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앗시리아는 한 나라와 다른 나라의 싸움으로 비춰진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서 본다면 이 사건은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하는 세상을 보여준다. 역사는 어느 때나 하나님과 대적하는 세상을 보여준다. 비록 교회의 지도자와 교회의 사람들로 인해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의 비난을 받게 될 때 하나님을 향해 공격을 한다. 교회의 잘못을 제보하는 내용은 결국 하나님 나라를 대항하는 것이다. - 물론 이런 잘못들을 모르쇠하고 소극적인 것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 한 스포츠 선수가 경기 중 기도하거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세레머니를 하면 사람들은 더욱 거세게 당사자와 기독교를 비난하고 하나님을 공격한다. - 카톨릭 선수가 성호를 긋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다 - 세상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 후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여 공격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진노하고 계시며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물으신다. 무서운 부분이다. 오히려 성경은 악인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 어떤 행위도 따르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다.(시37:1,잠언 3:31;23:17;24:1,19) 그러면서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고 경고를 한다. 오히려 이런 일은 야훼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신다.(잠 24:17-18, 시편 37편을 읽어보라)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했던 왕이었다. 그의 부친은 하나님을 철저히 배역했지만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분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그의 부친 아하스가 속국으로 자청했던 앗시리아(앗수르)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세상이 주는 보호와 영광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을 것을 결정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히 11:38a)
히스기야 왕을 통해 본 내 모습은 부끄러움뿐이다. 왕으로써, 한 개인으로써 그는 하나님 경외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산헤립의 공격에 스스로의 노력으로 돌파구를 찾으려했지만 결국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그리고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께 나아간다.
일이 터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다가올 때 나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먼저 경험과 관계를 통해 풀려고 노력을 한다. 그럴 때마다 일은 꼬여가고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을 수 없이 경험했다. 하지만 잠잠히 하나님께 나가 기도하고, 내 힘과 내 능력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낮추실 때 아하스 왕은 세상을 의지했고,(대하 28:19-25)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께 나아갔다.(왕하 19:1, 14-15)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아하스인가? 히스기야인가! 답은 쉽게 찾아진다. 그러나 정답의 길을 걷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개인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개인의 노력이 하나님을 앞서지 않도록 낮아지고 겸손하여야 한다. 개인의 노력이 하나님을 앞설 때 나는 아하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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