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양식/CoramDeo_호세아

[코람데오] 10월18일(화) - 호세아 1정 1절 '하나님을 섬기기'

TR.H.Lee 2016. 10. 18. 11:51

            

             호세아 1장 1절 / 하나님을 섬기기


[묵상]



'주님께서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주신 말씀이다. 때는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왕이 이어서 유다를 다스리고,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이다.'(호 1:1, 새번역)


요담은 그의 아버지 웃시야가 문둥병이 발하여 더 이상 왕권을 수행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을 보았다. 그는 25세의 나이에 유다 왕으로 등극을 하고 16년간을 통치한다. 그는 부친 웃시야 왕의 행위를 곁에서 지켜보았다. 아버지가 어떻게 강대해졌었고 어떻게 무너져갔는지를 알았다. 열왕기서(왕하 15:32-38)와 역대기서(대하 27장)에서는 요담 왕의 행적을 잘 기록하고 있다.


요담 왕 : 하나님을 섬기다


부친 웃시야 왕 36세에 요담이 태어났다. 어린이가 5~6세부터 기억하는 것을 볼 때 요담은 10년 동안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주변 서기관이나 군인 또는 제사장들로부터 부친 웃시야 왕이 어떻게 강대해졌는지도 들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자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요담 왕은 모태신앙의 전형적인 본(本)이 된 인물이었다.


1990년부터 기독교의 문제가 대두된 것은 모태신앙이었다. 모태신앙이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부부 사이에 태어난 아기가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접하면서 기독교 문화를 접하고 신앙을 갖게 된다. 1980년대에 방학을 하면 어머니들은 의례 교회를 보낸다. 당시의 간식이란 헤어진 고무신이나 소주병과 고철을 바꾸어 먹던 강냉이와 고구마가 전부였다. 그러나 교회에서 4일간 열리는 여름성경학교는 간식과 점심식사도 주기 때문에 녹녹치 않는 살림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접하게 되고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신앙도 갖게 된다. 이렇게 영접한 신앙의 특징은 부모의 반대와 저항에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모태신앙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까지의 고난(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신앙의 굴곡 앞에서 쉽게 무너지게 되고 쉽게 간직하게 된 신앙을 가벼이 대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 인구가 늘어나면서 모태신앙은 비중은 2000년대에 와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80년대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발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모태신앙은 신앙을 가벼이 볼 수 있는 것과 그리스도를 영접하기까지 고난을 겪어보지 못했다는 것이지만, 어느 것이든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듯이 모태신앙의 강점도 무시할 수 없다. 즉 오랜 시간 동안 신앙을 지켜주는 가족의 든든한 보호막이 있다는 것과 어린 시절부터 기도와 말씀을 통해 양육을 받기 때문에 신앙은 서서히 반석위에 서게 되는데 이는 부모와 선조의 신앙의 깊이에 의해 모태신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 바로의 궁전에서 자란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의 가정을 생각해보라. -


모태신앙이 복음 때문에 겪는 고난이 없는 것은 아니다.


80년대에는 한 가정에 예수를 믿는 사람이 한두 명이거나 혹은 없었다. 예수를 믿는 부류는 대부분 어머니 또는 자녀였다. 가부장적인 한국의 마인드는 가장의 세계관에 의해 가족의 세계관이 결정되는데, 당시는 조상을 섬기고 제사를 지내는 문화였기 때문에 가정을 지키는 것은 가장의 몫이었다. 당시의 아버지들에게 조상 제사를 지내는 것은 가풍을 따르는 것이고 효(孝)를 다하는 것이었다. 1년에 제사만 보자면 기일에 제사를 지내고, 명절(추석과 설)에 제사를 지낸다. 보통은 증조부 까지 제사를 지내니까 1년에 기본적으로 4번 이상의 제사를 지내고 가족 친지의 제사에 참여한다면 10번은 넘게 한다고 보면 된다. 이런 가풍에서 예수를 믿는 것은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한글개역)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이것은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3-4a, 한글개역)는 것이다. 이것은 제사를 지내지 말고 조상에게 절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제사의 문제로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가정은 불화를 겪기도 하고 쫓겨나기 까지 했다. 당시의 철야예배는 밤 11시에 시작해서 새벽 2시 넘어서 끝나는 예배였다. 예배는 11시에 시작해서 12시에 끝나고 30분 쉬었다가 새벽 2시 까지 기도회가 이어진다. 또한 부흥회가 1년에 2~3회 열리는데 저녁 7시에 시작해서 보통 10시 넘어서 끝이 난다. 그러다보니 집에 가면 이미 분노가 오를 대로 오른 아버지와 마주해야 하는 극한 상황의 공포를 느껴야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제발 우리 아버지가 주무시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간절히 드리기도 했다. 이런 문화에서 신앙을 지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내어놓는 기분이었다. 예배가 끝나고 집에 갈 때면 - 당시는 골목길이 많았다. - 골목을 지날 때마다 기도와 또 기도를 하면서 집에 조심스럽게 들어간다. 그리고 공포는 현실로 다가오게 되고 아버지는 성경책을 집어던지며 한바탕 난리가 일어난다. 주일 아침이 되면 아버지는 교회를 가지 못하게 하려고 방문에서 신문을 보시면서 감시를 늦추지 않으신다. 교회를 가기 위해 아버지의 눈을 피해 몰래 나가거나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온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옷을 주섬주섬 입고 나간다. - 당시는 화장실이 집 밖에 있었고, 아버지는 꼭 교회에 가는 시간만 집을 지키셨다. - 만일 교회 간 것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어렵게 구한 성경책은 불태워지고, 호통은 끊이지 않는다. 그렇게 신앙을 지켜왔던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자녀를 출산한다. 그들이 복음을 영접한 가정에서 태어난 신앙의 2세대는 모태신앙이라 불리게 된다.


모태신앙은 이런 경험이 없다. 하지만 2000년대에 와서 사회가 심각하게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품게 된다. 기독교의 지도자와 교인들이 사회를 향해 빛과 소금이기를 포기하는 일이 일어났고, 이런 행태는 매체를 통해 모든 국민의 공분을 사게 된다. 80년대만 해도 목사님들은 성도와 지역사회의 모범이었고 삶의 지침서였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하면서 그러한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예수를 믿는 것을 드러낸다는 건 어려운 일이 되었다.


모태신앙의 경우 오랜 시간동안 신앙생활을 보고 배웠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신앙의 깊이가 있었고, 교회를 반대하는 거센 저항력이 사회에 자생하기 시작했을 때 부모의 기도와 영적인 보호 아래 양육을 받았다.


모세는 그의 가족에게 보살핌을 받았고, 이스라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배웠다.(출 2:1-10, 히 11:23-26),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의 아버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자란다.


요담 왕은 그의 부친과 주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것을 배웠다. - 웃시야 왕의 영적인 스승 스가랴가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 스가랴가 죽고 난 후 부친 웃시야가 교만에 빠져 모든 상황이 역전되는 것도 보았다.


‘웃시야 왕은 힘이 세어지면서 교만하게 되더니, 드디어 악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주님의 성전 안에 있는 분향단에다가 분향을 하려고 그리로 들어간 것이다. 이것은 주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일이었다.’ (대하 26:16, 새번역)


교만은 아주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아무도 모를 만큼 그림자가 드리우듯이 찾아왔다. 그의 아버지 부친은 야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았다. 암몬과 블레셋을 복종케 했고 군대는 강성했다. 이집트(애굽)까지 자기의 명성이 들려졌고 백성들은 평안했다. 부친 웃시야는 부족할 것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스가랴의 간언에 따라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결과였다. 하지만 스가랴가 죽고 나서 그 간언이 사라졌고 부친 웃시야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한글번역에서는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라고 나와 있다. 교만은 부족할 것이 없을 때, 스스로의 위치가 올라갈 때, 주변에서 나를 받을 때 그리고 그것을 간언해줄 영적인 멘토가 없을 때 찾아온다. 강성해진 부친 웃시야는 하나님의 제단에서 분향하는 것은 꼭 제사장이 아니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주변 국가가 무릎 꿇고, 암몬이 조공을 바치고 내정은 부족할 것이 없는 이때에 왕은 당연히 직접 제사를 드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를 지배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제동을 거는 80명의 제사장들에게 분노하게 되고 이일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 그는 온 몸에 문둥병이 발하였다. 그는 왕좌에 쫓겨나고,  별궁에 숨어서 지내야 했다. 젊은 요담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웃시야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용감한 제사장 80명이 와서 간언을 했을 때 그의 행동을 멈출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증손자 히스기야처럼 주변에 레위사람과 선지자를 두고 스스로를 겸비할 수 있었다. 웃시야는 왕이었기 때문에 그 스스로가 하고자 한다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일을 포기했다. 포기한 그 순간 교만은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내가 교만 앞에 섰을 때 주변을 통해 제어(control)하신다. 주일 예배에 듣는 설교를 통해, 멘토와 담화를 나눌 때, 직장 상사에게 언질을 받을 때, 말씀을 읽거나 묵상할 때, 찬양을 들을 때 또는 다른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를 제어하신다. 그럴 때마다 나는 돌이켜 겸비하기 보다는 스스로를 합리화시킨 적이 많다. 하나님 앞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사람은 자존심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말씀과 책망을 택하는 사람이다.


'참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세워 주시는 사람입니다.'(고후 10:18, 새번역), '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약 1:12, 새번역)


요담은 그가 왕이 되었을 때 부친이 행한 것을 기억했다. 그는 먼저 부친이 행한 것중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게으르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왕국을 든든히 하고 왕의 도(道)라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부친이 야훼의 전에 들어간 일을 기억했다. 그는(요담) 야훼의 전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는 선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선조의 행위를 통해 자신을 살피는 것은 중요하다. 나는 때론 가족과 나에게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한다. 하지만 성경의 위인들은 하나같이 그와 같은 일을 통해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고 살피는 것을 게으르지 않는다. 요담왕은 그의 부친의 일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행위를 삼갔다. 성전에 들어가지 않는 요담 왕의 모습은 아쉬움이 남지만 그의 부친을 통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것이 바로 요담 왕의 진수이다.


또한 요담은 야훼의 전 윗문과 오벨 성벽 등 유다 성읍을 건축하고 견고한 영채와 망대를 건축했다. 그리고 암몬과 싸워서 이겼으며 암몬에게 3년간 조공을 받기도 했다. 성경은 '요담은, 그의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걸으며 살았으므로 점점 강해졌다'(대하 27:6, 새번역)고 증언하고 있다. 요담이 강해지는 것은 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로 행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나에게 많은 시사를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우리의) 약함과 연약함을 들어 강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높은 자를 낮추시고 비천한 자를 존귀케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강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존귀케 하시는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걸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바른 길은 스가랴가 웃시야 왕에게 가르쳤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개역한글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대하 26:6, 개역한글), 새번역에서는 '그의 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쳐 주는 스가랴가 있었는데, 스가랴가 살아 있는 동안, 웃시야는 하나님의 뜻을 찾았다.' 하나님 앞에 바른 길로 가는 사람들의 특징의 한 가지는 그의 곁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간언에 귀를 기울인다. 정리해보자면 하나님 앞에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우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요담에게는 그런 영적인 스승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성경의 기록은 없다. 그러나 다음의 구절을 통해 요담에게 간언해 줄 영적인 스승의 부재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산당만은 제거하지 않아서, 백성들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분향을 하였다.'(왕하 15:35, 새번역)


산당(shrines on high places)은 이스라엘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누어질 때 북이스라엘 왕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Ⅰ)이 만든 것이다. 그는 (북)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남유다)으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러 가는 것을 경계했다. - 민심이 흩어지는 것을 경계함 - 백성들이 예루살렘성전이 아닌 가까운 곳에서도 제사할 수 있도록 두 개의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하나는 벧엘에 두었고 또 하나는 단에 두어서 절기에 맞추어 제사하게 하였다. 그는 이 두 금송아지를 향하여 이렇게 선포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일은, 너희에게는 너무 번거로운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를 이집트(애굽)에서 구해 주신 신이 여기에 계신다."(왕하 12:28, 새번역) -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출 32:4, 새번역) - 이스라엘 백성이 왜 광야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샀는지를 여로보암(Ⅰ)이 세심히 율법서를 읽었더라면, 그 율법서를 읽어줄 선지자가 있었더라면 여로보암(Ⅰ)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여로보암(Ⅰ)의 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여러 높은 곳에 산당을 건축했다. 그리고 산당의 제사장을 세웠고, 이곳에서도 제사를 드리게 했다. 산당의 역할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견대로 제사를 드리게 하는 것이다. 결국 여로보암(Ⅰ)은 자신의 정치력으로 백성들을 모았고 환심을 샀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과 그 자신이 하나님을 배역하도록 만들었다. 요담은 이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다. 이는 민심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즉 그의 곁에서 간언해 주는 영적인 스승이 없었다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산당은 예배와 모임의 정통성을 부인(否認)하게 만든다. 산당은 나의 편리함과 내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섬기고 싶은 하나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우상이고 거짓 신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 꼭 교회에만 있어야 하냐고 반문한다.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고 편재(遍在, 시공간을 초월하여 계심)하시는 하나님을 건물로 한정짓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을 짓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통해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보이셨다. 즉 낮에는 성막위에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하는 것을 나타내셨다.(레 40:38)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 역시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임재 하는 곳이었다.(왕상 8:29) 성전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신다.(왕상 8:30-53) 이를 통해 볼 때 교회는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에 건물이 없어야 한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건물이 교회의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더욱 위로가 되는 것은 솔로몬은 야훼의 성전을 건축하는데 7년이었고(왕상 6:38), 왕궁 건설은 13년이 걸렸다.(왕상 9:10) 작금에서는 교회를 건축할 때 얼마나 많은 정성과 최고의 헌물로 하나님께 드려서 건축하느냐에 있지 않다. 얼마나 호화롭고 얼마나 고급적이고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에 관심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에 성령님을 통해 임재 해 계신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면 하나님의 관심은 교회 건물의 외모와 수준이 아니라 교회 안에 모인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각설.


이것을 통해서 내 자신이 하나님을 배역하고 있는 것을 본다.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내 마음과 생각이 교회를 무시한 것이다. 때론 개척 교회나 작은 교회를 볼 때면 마음속에서 한심스러운 생각을 토해낸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을 배역한 부분이다. 어려운 교회의 교역자들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이 그분들을 통해 일하신 것을 나도 모르게 평가를 한다. 이 또한 내가 하나님을 배역한 부분이다. 교회 건물을 치장하는 모습을 보고 건물에 치중하는 것에 비판하고 비평했었다. 하나님을 배역했다. 교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임이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나도 모르게 한다. 나는 하나님을 배역하는 몹쓸 사람이었다. 내 생각과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실소하고 비소하게 생각하는 내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을 배역하고 있는지를 본다.


요담은 유다 왕이 될 때 25세였었고, 41세의 나이로 그의 조상과 함께 잠이 든다. 16년의 치리기간이었지만 민심을 두려워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는 나름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혹자는 그가 산당을 제거하지 않아서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했기 때문에(왕하 15:35) 그의 치리가 짧았다고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근거를 논하기에는 설득력이 약하다. 그가 죽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요담이 항복을 받아낸 아람을 통해 다시 유다를 징치(懲治)하신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유다를 징치하신 이유가 아하스 왕(요담의 아들)이 하나님을 떠났고 배역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자명하다.(왕하 16:1-5)


나는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부름을(死) 받는 것에 대해 많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한경직 목사님은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한 이유로 평생을 속죄의 마음을 가지고 목회를 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재산을 모두 다 기부를 하셨다. 한국 교회에 그만큼이나 아픈 마음과 빚진 마음을 가지고 교회와 성도를 섬긴 분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경직 목사님을 부르셨다. 하용조 목사님의 마음은 개인적으로 표현해보자면 그 마음이 바다 같은 분이라 할 것이다. 자신의 양 떼들을 떼어주는 것이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한 일이라면 기꺼이 그렇게 하셨던 분이셨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셨고 젊은이들만을 위한 교회가 아닌 젊은이들도 함께 할 수 있는 교회를 하신 분으로 기록하고 싶다. - ‘청소년을 위한’, ‘청년들을 위한’이란 목회가 얼마나 위험성이 있는지 생각해보라. 그 교회의 지도자들이 어떻게 타락했는지를 보라. - 또한 한국교회를 위해서라면 쓴 소리도 아끼지 않으셨던 옥한흠 목사님은 평생을 제자훈련에 매달려서 교회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 교회가 강남에 위치해 있었지만 비천한자와 부한 자 모두를 위한 목회를 하신 분이다. 이 외에도 아직 한국 교회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경받으시는 목사님들이 계시다. 한국교회에 이런 분들이 한분씩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난 후 교회는 본질을 상실하게 되는 것을 본다. 안타깝고 한국을 위해서도 큰 손실이라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내 편향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교만이기에 더 이상 안타까워할 수만은 없다. 각설.


요담은 한 인간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한 사람이지만 한 나라의 왕이었다. 그의 통치력은 왕국이 나아갈 방향을 결정한다. 자신의 생각과 마음가짐 그리고 말 한마디가 얼마나 무겁고 신중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그는 산당만큼은 제거하지 못했다. 성경을 통해 보았을 때 민심에 의한 그의 모습이 위축되었을 수 있겠지만 그의 속을 알리가 없기에 정확하게 얘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산당을 통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절기에 하나님이 정하신 장소에 모이는 것을 싫어하는 것을 볼 때에 분명 민심에 흔들렸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의 결정이 왕국은 죄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럼에도 요담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셨다.




[기도]



하나님 신앙의 자랑은 주 안에서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모태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늘 자랑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이 있었는지를 회상합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앞에 겸손하기 보다는 비교하며 잣대를 내밀며 사람들을 판단했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또한 교회 건물에 대해 회의적으로 이야기하고 모이는 사람들까지도 비평합니다. 내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이 땅위에 세우신 교회를 폄하하며, 그의 피로 구속시키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판단할까요? 제 교만이고 제 생각이 하나님을 앞지르고 있었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내 스스로를 겸비케 위해서 예배와 말씀에 내 마음을 다 쏟도록 저를 도와주십시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로 저를 만나게 하사 주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제 태도와 마음을 견책하고 꾸짖어 나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내 죄가 은밀함 중에 들어나지 않도록 저를 살피히고 인도해주십시오. 늘 약하고 넘어지고 죄의 앞에서는 쓰러질수 밖에 없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