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양식/CoramDeo_호세아

[코람데오] 10월21일(금) - 호세아 1장 1절 '소망을 가지고'

TR.H.Lee 2016. 10. 21. 12:45


            

              호세아 1:1 / 소망을 가지고


[묵상]



'주님께서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주신 말씀이다. 때는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왕이 이어서 유다를 다스리고,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Ⅱ)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이다.' (호 1:1, 새번역)


(북)이스라엘은 솔로몬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왕국을 다윗의 자손과 여로보암(Ⅰ)에게 나뉘어 통치하게 하셨다.(왕상 11장) 솔로몬의 아들 즉 다윗의 자손은 유다를, 여로보암(Ⅰ)은 나머지 10 지파를 차지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왕국을 나뉘면서 여로보암(Ⅰ)에게 다윗을 본 받아 하나님의 율례와 명령을 지켜서 바르게 살 것을 말씀하셨다.(왕상 11:38) 하지만 여로보암(Ⅰ)은 백성들이 분열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올무가 되는 죄를 범하게 된다.


여로보암(Ⅰ)은 그 스스로가 정통성에 위배된 왕이었다. 다윗의 가문 즉 왕의 가문이 아닌 솔로몬의 신하 느밧의 아들이었고, 이스라엘의 큰 용사였다.(왕상 11:26, 28)


선지자 아히야는 여로보암(Ⅰ)에게 왕이 될 것을 예언한다.(왕상 11:29-39) 이 일이 솔로몬에게 알려지고, 솔로몬은 여로보암(Ⅰ)을 죽이려했고 여로보암은 그의 손에서 도망을 쳐서 솔로몬이 죽기까지 이집트(애굽) 왕 시삭에게 피하게 된다.(왕상 11:40)


여로보암(Ⅰ)이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대로 왕이 된 후(왕상 12:20) 그에게 근심은 백성들과 자신의 왕권 이었다. 이제 왕이 된 여로보암(Ⅰ)은 정통성으로 볼 때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고, 당시로 본다면 반역이기 때문이다. 왕국이 분열되었다고는 하나 백성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고 있었다. 절기를 지키기 위해 매 년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야했다. 이것은 백성들의 마음이 예루살렘과 (남)유다를 그리워하는 대목이다. 또한 자신의 정통성 문제가 대두될 수 있다. 그는 백성들을 규합해야 했다. 그리고 반역에 의해서 일어난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피력해야 했다.


하지만 여로보암(Ⅰ)은 이런 문제 앞에서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왕권이 하나님께 나온 것처럼 문제의 해결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그의 인간적인 열심(능력)은 두 개의 금 송아지를 만든다. 하나는 벧엘에 두고 또 하나는 단에 두었다. 그리고 백성을 향해 선포했다.


왕은 궁리를 한 끝에, 금송아지 상 두 개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일은, 너희에게는 너무 번거로운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를 이집트에서 구해 주신 신이 여기에 계신다." (왕상 12:28, 새번역)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에 죄가 되었다. 백성들은 저 멀리 단 까지 가서 금 송아지를 섬기게 된다.(왕상 12:30),


여로보암(Ⅰ)은 여러 높은 곳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이 아닌 일반 백성으로 산당의 제사장으로 임명한다. 그는 유다에서 행하는 절기와 비슷하게 절기를 다시 정하고, 벧엘에 세운 제단의 금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다. 왕은 그 스스로가 보기 좋을대로 절기를 정하고 분향함으로써 백성들을 규합하고 있었던 것이다.(왕상 12:31-33) -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개역한글) -


이것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에게 올무가 되었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Ⅰ)의 죄를 승계했고 그 죄에서 도무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 그도 그의 부친(여로보암Ⅰ)이 걷던 그 악한 길을 그대로 걸었으며, 또 이스라엘에게 죄를 짓게 하는 그 잘못을 그대로 따랐다 (왕상 15:26, 새번역)


- 그는(바아사)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고, 여로보암(Ⅰ)이 걸은 길을 그대로 걸었으며, 이스라엘에게 죄를 짓게 하는 그 죄도 그대로 따라 지었다. (왕상 15:34, 새번역)


- 시므리가,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행을 하고, 여로보암(Ⅰ)의 길을 따라 가서, 이스라엘에게 죄를 짓게 한 그 죄 때문에 생긴 일이다. (왕상 16:19, 새번역)


- 그는(오므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Ⅰ)이 걸은 모든 길을 그대로 따랐다. 오므리는 이스라엘에게 죄를 짓게 하고, 또 우상을 만들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게 하였다. (왕상 16:26, 새번역)


- 그는(아합)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Ⅰ)의 죄를 따라 가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더 앞질렀다. 그는 시돈 왕 엣바알의 딸인 이세벨을 아내로 삼았으며, 더 나아가서 바알을 섬기고 예배하였다. (왕상 16:31, 새번역)


- 그(아하시야)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이스라엘을 죄에 빠뜨리게 한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걸은 길과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Ⅰ)이 걸은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왕상 22:52, 새번역)


- (요람) 그러나 이스라엘을 죄에 빠뜨린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Ⅰ)이 저지른 것과 같은 죄에서는 벗어나지 못하고, 그로부터 완전히 돌아서지도 못하였다. (왕하 3:3, 새번역)


- 그러나 예후는, 베델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를 섬겨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Ⅰ)의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지는 못하였다. (왕하 10:29, 새번역 / 31절 참조)


- 그러나 그는(여호아하스) 주님 보시기에 악한 행동을 하였고, 이스라엘로 죄를 짓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Ⅰ)의 죄를 따라가, 그 길에서 돌아서지 않았다. (왕하 13:2, 새번역)


- 그는(요아스),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이스라엘로 죄를 짓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Ⅰ)의 모든 죄로부터 돌아서지 않고, 그 길을 그대로 걸었다. (왕하 13:11, 새번역)


- 그는(여로보암Ⅱ)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이스라엘로 죄를 짓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Ⅰ)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것을 그대로 본받았다. (왕하 14:24, 새번역)


- 그도(스가랴) 또한 조상이 한 것처럼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이스라엘로 죄를 짓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Ⅰ)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것을 그대로 본받았다. (왕하 15:9, 새번역)


(므나헴) 그는 이스라엘로 죄를 짓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Ⅰ)의 죄에서 일생 동안 떠나지 아니하고, 그것을 그대로 본받았다. (왕하 15:18, 새번역)


(브가히야) 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그는 이스라엘로 죄를 짓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Ⅰ)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대로 본받았다. (왕하 15:24, 새번역)


(베가) 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그는 이스라엘로 죄를 짓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Ⅰ)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대로 본받았다. (왕하 15:28, 새번역)


(이스라엘 마지막 왕 호세아 시대)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자손은, 여로보암(Ⅰ)이 지은 그 모든 죄를 본받아 그대로 따라갔고, 그 죄로부터 돌이키려고 하지 않았다. (왕사 17:22, 새번역)


여로보암(Ⅰ)의 죄는 결국 (북)이스라엘에게 죄의 길을 열어준 계기가 된다. -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옴을 기억하라. 롬:519 - 그는 민심을 모으고 왕의 정당성을 세우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왕이 된 동기가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았다.


솔로몬이 다윗의 길을 따르지 않고, 이방 신을 따르고 경배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Ⅰ)을 일으키셨다.(왕상 11:33)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서 분명히 여로보암(Ⅰ)에게 말씀하셨지만(왕상 11:29-39) 그는 이 말씀을 기억하지 않았다.


"여로보암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겠다. 너는 네가 원하는 모든 지역을 다스릴 것이다. 네가, 나의 종 다윗이 한 것과 같이, 내가 명령한 모든 것을 따르고, 내가 가르친 대로 살며, 내 율례와 명령을 지켜서, 내가 보는 앞에서 바르게 살면,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며, 내가 다윗 왕조를 견고하게 세운 것 같이, 네 왕조도 견고하게 세워서, 이스라엘을 너에게 맡기겠다. 솔로몬이 지은 죄 때문에 내가 다윗 자손에게 이러한 형벌을 줄 것이지만, 항상 그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왕상 11:37-39)


나는 말씀과 묵상, 기도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인간적인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열심으로 나타난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 보다는 인간적인 노력과 계획으로 그 일을 진행한다. 또 기도를 하지만 형식에 그칠 뿐 기도의 내용대로 나를 움직이지 않는다. 나를 움직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를 기다리기보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갖고 내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모든 것을 소진시킨다. 결국 이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열심은 언제나 결과일 뿐이지 과정은 내가 한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자문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일으키고 사람을 세우신다. 이 과정에서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그 일을 진행한다. 그러나 스스로의 열정과 능력에 갇힌 사람은 그 스스로의 능력과 열정앞에서 함몰이 된다. 결국 그의 열정과 능력만 칭송 받을 뿐이다.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Ⅱ)은 (북)이스라엘을 41년간 다스리면서 열왕의 죄를 담습하고 있었다. 이 기간은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Ⅱ)을 통하여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시키신다.(왕하 14:25)


당시 (북)이스라엘의 상황은 처참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을 향하여 그의 긍휼을 거두지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고난이 너무 심하여, 매인 사람이나 자유로운 사람이나 할 것 없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아, 이스라엘을 돕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것을 보셨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 지워 없애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여호아스(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을 시켜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이다. (왕하 14:26-27, 새번역)


(북)이스라엘의 왕조를 살펴본다면 왕권 찬탈과 살인으로 얼룩진 역사이다. 그에 비해 (남)유다는 다윗의 자손이 다스리고 있었다. (북)이스라엘은 모든 왕들이 죄로 얼룩진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를 일으키신다. 이 시기가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Ⅱ)이 통치하던 시기이다.


시기적으로 볼 때 본문(호 1:1)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한다. 여로보암(Ⅱ)이 왕이 되었을 때(왕하 14:23), 유다는 아마샤가 통치하고 있었다. 쉽게 본다면 여로보암(Ⅱ) 통치기간에 유다는 아마샤 왕과 그의 뒤를 이은 아사랴(웃시야)왕이다. 그러니까 본문의 시기 즉 여로보암(Ⅱ) 통치기간인 호세아 선지자의 활동 시기는 웃시야 왕 통치기간 중으로 보는 것이 맞다. 그런데도 성경은 호세아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여로보암(Ⅱ)의 시대와 상관이 없는 [요담 → 아하스 → 히스기야]를 거론한다. -  호세아서는 여로보암(Ⅱ)과 (북)이스라엘을 향한 선지서다. -


표현을 달리하자면 '때는 아마샤와 웃시야(아사랴) 왕이 이어서 유다를 다스리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성경은 '때는 웃시야(아사랴)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왕이 이어서 다스리고,' 쓰고 있다.


이 표현은 다른 선지서와 맥락을 같이한다.


'때는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왕이 이어서 유다를 다스리고' (호 1:1, 새번역)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사 1:1, 새번역)

'때는 유다의 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대를 이어 가면서 유다를 다스리던 기간이다.' (미 1:1, 새번역)


이 상황에 대해 신학적인 근거를 제시하기엔 부족하기에 각설하겠다. 다만 웃시야때부터 히스기야까지 본다면 분명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소망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 분명하다.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북)이스라엘을 향하여 여전히 뜨거운 마음으로 소망을 가지시하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호세아 선지자는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런 표현은 후대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라고 보는 것이 맞을것 같다. 호세아 선지서의 말씀은 분명 여로보암(Ⅱ)과 그 시대를 향한 말씀이었고, 그 시대의 백성들은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왕조에 대해서 알 리가 없었다. 이 선지서가 미래를 예견해서 '앞으로 웃시야 왕의 뒤를 이어서 요담 왕과 아하스 왕과 히스기야 왕이 나오는데 그걸 미리 예언해주는 것이다'라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여전히 소망을 품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작금의 시대에 주시는 말씀이다.


몇 달 전만 해도 지진은 다른 나라 얘기였다. 그러나 한국은 더 이상 지진으로부터 안전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온 국민과 세계가 목도했다. 태풍으로 인해 해안가 도시가 침수 되었다. 생각해 볼 수 없는 일이다. 이제는 만조가 높어져서 해안의 물이 육지로 들어오고 있다. 과연 이런 일들을 과학으로 풀 수 있을까? 이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일들의 징조를 가르치셨다.(마 24:3-14, 막 13:3-13, 눅 21:10-19) 전쟁과 지진 그리고 기근과 전염병,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일어날 것을 경고하셨는데, 이는 큰 환난을 말한다. 이 환난은 인재(人災)가 아닌 재해(災害, 자연적인 재해)이며, 일종의 사인(sign)이다.


작금의 재해를 볼 때에 말씀을 목도한다면 그날의 징조가 조금씩 보여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교회와 현실에 안주하기를 원하는 나는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외치고 있다. - 여기서 말하는 '평안하다', '안전하다'는 시기를 구별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


또 한국을 들여다 보면 많은 젊은이들이 '헬조선'을 외치고 있다. 이는 지옥이란 뜻의 접두어 'Hell(헬)'과 한국을 지칭하는 '조선'의 합성어로, '더 이상 한국에 희망이 없다'는 이 시대의 슬픈 신조어이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연일 터지는 매스컴을 통해 사고가 끊이지 않고, 정부와 정치인들이 국민들을 위한 정치와 정책을 이미 포기한 것처럼 느껴질때마다 '헬조선'을 외치는 절규가 느껴진다. 안전에 대해서는 언제나 뒷전이고, 적은 급료로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더욱 어렵게 몰아가는 구조를 방관 한다. 실생활 필요경비 항목의 물가는 오르고 있고, 월급은 제자리에서 하향 곡선을 긋고 있다. 정부와 정치인들은 해결책을 찾는다고 하면서 아웅다웅할 뿐 정작 모르쇠이다. 오죽 하면 행실과 언행이 무겁고 바르게 해야 할 공무원이 사(私)적인 자리에서 신분론에 대한 본심이 취중진담으로 나왔겠는가. 결혼과 출산에 대한 방책이 겨우 지원금 주는 것으로 그들의 역할을 다했듯이 발표를 한다. 왜 젊은이들이 결혼을 미루고 출산을 포기해야 하는지, 그런 시스템 속에서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는지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알면서도 모르쇠이다. 나는 이런 작금의 상황에서 젊은이들이 헬조선과 탈한국을 외치는 것을 이해게 되었다. 더욱이 더 아픈 것은 교회가 이런 문제 앞에서 모른 척하고 있다. - 예산을 지원하라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어려움을 함께 공감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고 행실을 삼가게 된다. -


이러한 상황에서도 사람은 소망을 내려 놓고 '헬조선'과 '탈한국'을 외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소망을 품고 계시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서를 통해서 망해가는 (북)이스라엘을 향하여 그 행실을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이 보지 못했던 아니 볼 수도 없었던 후대의 왕들의 모습을 나와 당신에게 보여주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아니 하나님을 경외하는것이 답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사는 것이 아무리 팍팍해도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소망을 붙잡아야 하고, 성도는 그 소망으로 세상을 이겨야 한다. 그러나 이 무서운 말씀을 들을 자가 누구일까? 과연 내가 그 자격이 될까?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전해지고 선포된다.(막 4:3, 14, Theistic Realist), 그러나 그 말씀을 들을 자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한 사람일 것이다.(막 4:23) 내가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의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몇몇의 사람들을 유월절에 초대한 것 같이(대하 30:11) 하나님의 부흥은 큰 기쁨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것을 나는 믿는다.(대하 30:13)



[기도]



하나님. 호세아 선시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소망과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가르치심을 감사합니다. 아담으로 부터 죄가 흘러 나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죄는 하나님을 향하여 공격을 감행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과 상관없이 여전히 참 하나님이시며, 여전히 세상의 주인이며, 여전히 우주의 창조주이심을 보이셨습니다. 내 조급함과 내 비소함으로 하나님을 작게 만들고 우상을 만들어서 세상을 향해 대적하려 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향하여 조롱하게 만드는지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벼이 여긴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또한 세상을 바라보며 이제 소망이 없고, 그 끝을 달리고 있다고 말하는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은 여전히 소망을 품고 계시며 여전히 만유의 주가 되시며 생명의 주인이 되십니다. 내 마음이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하시고 주를 향한 겸손함을 배우게 하여 주십시오. 당신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