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묵상은 2006-07-25에 Daum 블로그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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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3:39-43
평행선에 선 사람들
예수님 곁에 함께 십자가형에 처해진 두 명의 범죄자가(the criminals)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강도로 묘사하고 있다(two robbers / Matt.27:38).
이들이 정확히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모르지만
당시의 십자가형은 중죄에 해당하는 형벌로서 반역자들에게 내려진 것으로
예수님곁에 함께 처형되는 범죄자들은 사회적으로 중죄인인 것만은 틀림없다.
예수님을 향한 사람들의 조롱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믿었던 사람에 대한 분노와 배신의 감정을 예수님도 느꼈을 것이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범하지 않으셨습니다.(히 4:15, 표준새번역)
예수님은 보리떡과 물고기로 5천명(장정만 계수)과 4천명이 먹을 수 있는 기적을 베푸셨다.
마가복음 8장에서는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이 3일동안 함께 있었고,
그 상태로 집으로 돌아가면 허기짐으로 쓰러질 것을 염려하셨다(막 1-9).
그리고 이들이 누려야 할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일침을 놓았다.
(마 23:13-35, 막 12:38-40, 눅 11:37-52, 눅 20:45-47)
죽은 자를 살리시고 각종 병든 자를 고치시며,
하나님의 저주아래 있었던 한센병(시대의 문둥병)과 유출병에서 자유를 주셨다.
앉은뱅이가 일어났다.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소리를 듣게 되었다.
한 쪽 손이 마른 사람이 정상인 처럼 손이 소생되었다.
그리고… 그리고 사람들은(제자들을 포함)
예수님이 로마로부터 유대를 속박해 줄 메시야로(정치적인) 굳게 믿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잡혀가셨을 때 대단한 반전을 기대했다.
그 반전속으로 더욱 가까이 가고 싶었던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뜰까지 몰래 접근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고,
바람을 잔잔케 하시고,
바다를 걸어가셨고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시던 예수님이
초연히 사형장으로 가셨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은 더더욱 반응이 없으셨다.
사람들의 생각속에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을 보았다.
제자들은 꿈속에서라도 일어나지 말아야 할 그 일을 듣게 된 것이다.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처형된다는 것을…
하늘을 찌를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음성이기 보다는 처절한 몸부림의 외침이었는지도 모른다(a loud voice-Matt.27:50).
그리고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
성소의 휘장은 모세 이후로 전해져 온 것으로 한 번도 찢어진 적이 없는
신성불가침의 지역의 보호막이었다.
그것이 찢어졌는데도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다.
‘예수가 죽었다. 우리를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줄 알았던 그 예수가 죽었다.’
오직 이것이 그들의 관심사였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터졌다(shook,split).
그런데도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예수는 사기꾼이었다고?’.
무덤의 문이 열렸다. 꼼짝하지 않았던 시체가 일어났다(opened,raised).
하지만 관심은 오직 ‘예수가 죽었어. 그가 죽었단 말야. 무기력하게..’였다.
사람들과 제자들의 관심은 오직 죽음(death)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겼다.
하지만 제자들은 기억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마 16:21, 막 8:31, 눅 9:22)
이 분명한 극단 속에서 평행선이 존재한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형을 집행받은 두 범죄자.
이들은 예수라는 인물을 가운데 두고 평행선에서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다.
이들은 사람들이 예수를 조롱하고 욕하자 자신들도 가운데 있었던 예수를 향해 욕을 했다(마27:44).
하지만 잠시 후에 범죄자 한 명은 예수를 향해 다른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속에 끓어 오르는 양심을 억누르지 못했었을수도 있다.
그는 예수의 모든 행적을 이미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서 예수를 향해 홧김에 욕을 했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다.
한 범죄자는 예수를 향해 비방을 그치지 않았다.
"네가 그리스도라고? 그럼 너와 우리를 구원해봐! 이 처형장에서 우리와 너를 살려보라구!"
Are You not the Christ? Save Yourself and us!
죽음의 문턱에 선 한 범죄자는 예수에게 실리는 사람들의 야유와 조롱 그리고 분노를 되받아 치고 있었다.
다른 범죄자는 달랐다.
그는 반대편에 죽어가면서 예수를 향해 치를 떠는 그를 향해 꾸짖었다.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아? 너는 당연히 받을 벌을 받고 있는거야!"
Do you not even fear God, since you are under the same sentence of condemnation?
이 말은 지금 이 범죄자의 마음 상태를 보여준다.
"우리는(너와 나는) 마땅히 받아야할 죄의 벌을 받고 있는거야. 하지만 이 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어."
And we indeed are suffering justly, for we are receiving what we deserve for our deeds; but this man has done nothing wrong.
여기서 the same sentence는 '마땅히 내려진 판결의 형벌'을 뜻한다.
즉 십자가의 형벌을 받은 것은 이 두 범죄자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한 범죄자는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당연함은 자신을 포함한 우리(we)로 확장하고 있다.
그러나 가운데 있는 예수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왜 일까? 왜 알고 있었을까?
예수의 행하신 사역과 가르침은 결코 숨겨지거나 축소되거나 왜곡되어질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었으며(요 1:1), 생명이셨으면 빛이셨다(요 1:4).
예수님의 사역은 소금과 빛의 사역이었고(마 5:13-16, 막 9:50, 눅 14:34-35),
그 어떤 것도 숨길수가 없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 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을 때(마8:4;9:30;눅5:14;8:56),
온 땅에 예수의 소문이 돌 정도로(마9:31;눅5:15)
예수님의 사역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셨다.
이제 이 범죄자는 자신의 잘못을 돌이킨다.
비록 작금의 교회시대에서 말하는 회개의 형태는 아니지만 그는 예수에게 구하고 있다.
"예수님, 당신이 당신의 나라에 계실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Jesus, remember me when You come in Your kingdom!
십자가 형을 받을 만큼 끔찍한 죄를 지은 그가
이제 지난날의 자신을 후회하며 겸손히 예수에게 구하고 있는 것이다.
무작정적인 구함이나 외침이 아니라 종용한 자기성찰의 고백이다.
이 고백에는 이 범죄자의 믿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예수님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 오르는 것을 내포한 고백이다.
You com in Your kingdom
이 범죄자에 대한 예수님의 배려는 깊다. 그 배려는 단순한 배려가 아니다.
범죄자의 믿음에 대한 응답이다.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너는 나와 함께 그 곳에 있게 된다."
Truly I say to you, today you shall be with Me in Paradise.
종종 고통과 실망이 가득한 좌절의 자리는
구원을 속히 받는 기회의 자리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자신의 고집과 생각의 세계에서 계속적으로 거하느냐(=이기느냐)
아니면 그것을 걷어내고 자신을 돌아보며 정직해 지느냐에 있다.
한 범죄자는 자신의 생각과 세계를 지켰다.
그 결과 그는 예수님께 그 어떤 확답도 듣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사람들과 자신의 물음에 대한 확답을 예수님께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If You are the King of the Jews, save Yourself - NASB
그러나 믿음은 실체가 아니다. 믿음은 실체에 가려진 진리이다.
다시 말해서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내 앞에 있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믿는 확신이다.
성경은 이 것을 이렇게 증언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바탕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실상 옛 조상들은 믿음이 있었기에 좋은 증언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
곧 보이는 것은 나타나 있는 것에서 생기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히 11:1-3, 표준새번역)
이것은 믿음이 '보이는 것을 통해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 나타난 것'임을 시사한다.
히브리서 11장은 이러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받은 사람들 즉 믿음의 사람들을 증명한다.
여기에 다른 범죄자를 보라.
그는 예수님께 확답을 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고 그에게 요청했다.
한 범죄자는 이 고통과 죽음의 공포에서 건져내는 것을 구했다면
다른 범죄자는 내 옆에서 죽어가는 이 사람이 하나님이시며(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음)
겸손하게 자신의 죽음이 자신의 죄로 인한 것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했다.
이것이 예수님께 응답 받은 범죄자의 모습이었다.
성경은 이러한 상황을 보여준다.
바리새파 사람과과 세리인이 기도하러 갔을 때
세리인은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뜨지도 못했다(당시의 기도는 일어서서 위쪽을 쳐다 말함).
자신은 죄인이며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았다(눅18:14).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은 옆에서 기도하는 세리인을 향하여 심판했고
자신의 종교적인 생활을 드러냈다(=자랑했다. 눅 18:11-12).
자신들의 아픔과 상처를 고쳐달라고 구하는 병자들에게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고 회개하라고 촉구 하는 대신
그들을 자유케 함으로 응답을 대신하셨다.
12년간 혈루증으로 고통을 가진 한여인이 군중 속에서 자신의 옷을 몰래 만지자
그녀를 드러내어 사람들앞에서 구원(자유)을 선포하셨다.
그녀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남났고, 오랜기간 동안 그녀를 괴롭힌 병에서 고침을 받았다(눅8:48).
가나안 여인이 자신의 딸을 위해 빵부스러기 같은 믿음을 구할 때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시며 딸을 고쳐주셨다(마15:28).
이처럼 예수님은 구하는 모든 자의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에 응답을 하셨다.
예수님은 허투루 말씀하시거나 약속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약속을 지키시며 언제나 진실하셨던 분이셨다.
(영원전에 진실하셨고 영원후에도 진실하신 분이시다)
"당신께서 그 나라(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Jesus, remember me when You come in Your kingdom
"(정말로)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Truly I say to you, today you shall be with Me in Paradise
한 범죄자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죄의 벌에 대한 항변으로 예수님을 모욕했지만
다른 범죄자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믿었으며 정중히 구했다.
나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이 행악자는 어떻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이해하고 믿을 수 있었을까?’
지금처럼 신앙(or 신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쳐 주거나
그 신학을 배운 목사나 전도사 혹은 교회 같은 선교단체서 배우지 않았는데도
그는 내가 믿는 것 보더 더 깊이 믿고 있었다.
‘너무 극단적인 해석이잖아?’라고 말할수 있겠으나
지금 우리는 믿음에 대해서 표면적으로, 학문적이로, 지식적으로 증명을 하지만
당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금보다 세계관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유대의 관점은 일원론적이다. 그리고 유대를 지배하는 로마는 헬레니즘 세계관이었으며
이 세계관은 유대인의 관점인 일원론과는 다르게 이원론적이었다.
이원론적 관점 즉 헬레니즘적 세계관으로 보면
믿는 것은 단지 이해했을 뿐이지 그것을 증명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다.
믿는 것을 말할 때 먼저 아는것 그리고 두번째는 그 아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잘 알고 있어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여도
증명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학문적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며 불완전한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즘은 일원론적인 세계관으로서
믿는것 즉 믿었다면 당연히 믿음에 대한 행동과 삶의 태도를 살아야한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것 내가 아는 것은 당연히 내가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헬레니즘은 이러한 것들을 또 다시 나열하며 설명하며 증명하려고 시도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세계관과 세상의 세계관이 충돌하는 이유이다.
당시 시대의 바리새파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제사장파는
예수님에 대해서 끊임없이 증명을 요구했다.
반면에 예수님께 용서받은 사람들, 믿음을 보인 사람들, 자유를 얻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돌이켜 다시는 죄로 가지 않기 위해서 행실을 바르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일 지키기에 힘썼다.
십자가는 범죄자에게 가장 가혹하다는 사형집행의 방법이었다.
성경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고 말한다(신 21:23).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의 저주를 받은 분이라고 성경은 증언한다(갈 3:13 b).
예수님이 받은 율법의 저주는 우리의 죄를 위한 것이었다(갈 3:13 a).
사람들은 율법의 저주아래에서 죽음의 선고를 받고 손과 팔에 못이 박힌
고통에 일그러져서 피를 흘리고 있는 예수님을 향해
그 스스로가 하나님을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믿었던 한 범죄자는
자신이 하나님께 긍휼을 구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라는 헬레니즘 세계관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한 사람의 고백인 히브리즘 세계관을 향한 공격이었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했을 때 이를 의심한 제자들은 있었지만
분명한 세계관에 서 있던 여인들은 무덤이 열려진 사건을 통해
슬퍼하는 것을 멈추고 기쁨과 소망으로 나갔다.
그리고 사도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그들의 세계관이 굳게 서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평행선은 두 점을 잇는 선이다.
두 점은 결코 다시 만날 수 없다. 이것이 평행선의 원리다.
그러나 평행선이 시작된 곳으로 가게되면 원래의 점으로 만날 수 있다.
예수님은 점의 시작 곧 중심이셨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다른 편으로 가게 되었고
예수님이 서계신 그 나라로 오기란 불가능해졌다.
그 가능성을 여는 것이 바로 여자의 후손을 보내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였다(창3:15).
예수님이 이땅에 사람으로 오신 것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서 이미 결정되어진 사항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평행선을 이루는 사람들을 다시 하나님으로 돌이키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즉 예수님이 분기점이 되시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에게만 가면 하나님께로 가는 길로 들어설 수 있다.
한 범죄자는 이것을 거부했고 다른 범죄자는 이것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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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istic Realist Hebron Lee
1차 수정 20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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