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NOTE

내 인생의 책 <위기에 처한 이성>

TR.H.Lee 2017. 8. 18. 14:38


필립 존슨 /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p)


2003년 여름으로 들어선 길목이었던것 같다.

IVF(한국기독학생회)가 세계관과 (캠퍼스)선교가 주목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관이 나에게는 약해보였다.

늘 세계관에 대한 부담과 함께 성경적인 세계관에 대한 미진함은 나에게 있어서 돌부리에 걸쳐진 모습과 같았다.

그러던 차에 제임스 사이어의 글을 우연찮게 보게되었고 자연스럽게 <위기에 처한 이성>을 읽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안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은  짐작할 수 없었다.

오래 묵혀두었던 된장을 꺼내듯이 먼지가 자욱한 책을 꺼내들고 미뤄두었던 숙제를 하듯 무미건조한 읽기(?)가 시작되었다.


과학과 법 교육 등 지식 세계 전반을 장악하고 있는 자연주의 세계관의 실체와 무서움을, 나는 인생 처음으로 맞닥드리게 되었다.

그동안 진화론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지식기반이 약하기에 결코 대화를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고

성경만 늘 읽던 목사님들의 언변과 논리는 석박사들이 장악한 진화론을 이길수 없다고 생각을 했었다. 또 그렇게 믿었었다.

성경적인 세계관 즉 창조론이 사실이고 그것이 정답이긴 해도 사람들은 이미 학문과 과학 전반에서 진화론을 지지하니까

인정하든 안하든 진화론과 부딪혀서 별 소득이 없을거라는게 내 입장이다.

그런 나를 향해 이 책은 말했다.


"너 하나님을 믿니? 세상이 하나님이 지으신것과 그가 우리의 창조자 되시는 것을 믿니?"

"하나님이 창조이전부터 영원까지 계시며 지금도 계시는 것을 믿니?"

"그 분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거기 계시다는 것을 믿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 10:28, 개역한글)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었다.

캠퍼스에서 리더였고 중책을 맡은 책임자였었지만 정작 자연주의 세계관앞에 무릎꿇고 있었다.

예수를 믿고 순수하게 살면 되는줄 알았던 내 삶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사실 이런 질문이 처음이 아니었다.

1998년 즈음 남들앞에 서지 못하는 내 성격과 내면이 어두움때문에 나는 결코 변할 수 없을 거라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나를 변화시켜 달라고 무던히도 기도했었는데 하나님은 나에게 성경을 통해 말씀하셨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6~17, 개역한글)


그때, 변할 수 없을거라고 굳게 믿는 내 마음과 그런 나를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의 충돌이 일어났다.

나는 나를 향해 질문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사람을 변화시킬 것을 믿니?', '응 믿어'

'그럼 그 하나님이 나를 변화시킬 것을 믿니?', '.....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믿지만... 나는 어려울 것 같아.'


나는 내 마음의 아픔과 감정의 기복으로 주변을 향해 돌과 화살을 날렸었다. 그런 나 때문에 상처와 다툼이 일어났다.

그런 나를 변화시키기 어렵다고 나 스스로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질문을 던지셨다.

"너는 나를 믿지 않는다."


사람들은 성격프로그램 등으로 개인의 성격을 규정을 짓는다.

그리고 혈액형을 통해 개인의 성격을 가둬놓는다.

그런것들을 이제는 성경인물까지 적용시켜 그 프로그램안에 자신을 가둔다.

정말 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일까? 아니었다.

나를 변화시킬수 없는 하나님께 내가 무엇을 구할 수 있으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저 나는 내 안에 새긴 우상을 만들고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었다.

나는 우상을 섬긴 것이다.


그때 믿음에 대해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불위하셔서 무엇하나 능치못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능력없음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내 뜻과 생각으로 한계성 즉 데드라인을 만든 것이다.

그것이 우상이었다. 나는 우상을 만들고 그것에 절하며 내 생각과 뜻을 주입시키는 우상쟁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아니 2003년도 그 해 초여름 나는 또 하나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세상을 지으시고 만드신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가?

모든 지혜가 하나님으로 부터 시작되었으며

세상도 지혜로 지어졌음을 믿는가?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학문이 예수의 이름앞에 무릎꿇는 것을 믿는가?

그런데... 이 부분에서 나는 나약해진다.

아멘. 아멘. 아멘. 그런데.... 그래야겠지... 한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9~10, 개역한글)


<위기에 처한 이성>은 미국의 필립존슨이라 불리는 사람이 쓴 책으로 -이 책의 내용은 지금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는 신학자도 목회자도 아니었다. 그의 전공은 법있고 직업도 법률쪽이었다.

그런 그가 창조론을 우습게 여기고 진화론으로 미국을 도색하는 자연주의에게 제동을 건 것이다.

당시 미국의 기독교에서는 필립 존슨을 향하여 다툼을 일이키는 자라고 손가락질을 했었다.

그러나 필립 존슨은 하나님의 법이 땅에 떨어지는 것이 참을 수 없었다.

그가 신봉하는 학문이 아니었다. 이것은 사실이고 역사이며 창조주 하나님앞에서의 큰 죄악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지금도- 자연주의 학문앞에 침묵했다.

당시 미국의 법앞에 바른 재판장이 십계명 돌판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경질했을때

(교회는)그 재판장을 향해 고개를 흔들었었다. -작금의 한국과 다를게 없다-


그런 시대에 필립 존슨은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진화론으로 몰고가는 자연주의 학문과 그것을 신봉하는 학자들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은 것이다.


창조론은 허구처럼 보인것 같아도 잘 들여다보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라는 결론이 나온다.

만약 창조론이 없었다면-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지 않고 진화가 되었다면- 세상은 더 이상 법을 수호할 필요가 없고

선한 것을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그저 자신들의 편한대로 법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삿 21:25, 개역한글)


진화론은 '만약'과 '우연'에 기반을 두고 있다.

지금도 진화론 학자들은 진화의 증거를 찾기 위해 그 흔적을 좇고 있다.

마치 진화가 사실인 마냥 이론을 정립 하지만 사실 그들도 진화론에 큰 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그 순간 진화론은 무너지게 되고 진화론을 지탱한 자연주의 역시 균열을 멈출 수 없다.


자연주의 철학을 공부하다보면 불교나 타종교가 이런 자연주의에 기반을 둔 사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언제나 세상은 창조론을 대적할수 밖에 없다. 교회가 세상의 공격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진리이기 때문에 공격을 받는 것이다. -비진리는 진리를 무너뜨리려는 속성을 갖는다. 이것이 죄의 속성이다.-


만약 진화론이 맞다면 진리는 없는 것이고, 그렇다면 사람들은 선하게 지낼 이유가 없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정답이고 다른 사람이 추구하는 것을 막을 권리가 있으며, 다른 사람의 공격으로부터 싸울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법칙이다. 여기서부터 파생되는 것이 바로 권리찾기이다.

성경에서도 권리찾는 모습에 대해-위험성을- 경고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각설(却說)


내 마음이 진동하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한 것인가? 하면서 자책하고 있었다.

그냥 무미건조하게 사는 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아니었다.

적어도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만 했다.

하나님을 믿고 그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포기하고 세상을 따를 것인가?


적당히는 없다.

야구에서도 1루수가 공을 받는 것과 타자가 베이스를 밟는 행위가 똑같다면 아웃으로 판정한다.

무승부라는 것도 사실 진것이다. 승부를 못내었으니 둘이 진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그의 완전한 삶을 따르며 행하는 것이다.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 17:1, 개역한글)


나는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분이 실재하시는 것을 믿는다.

그것은 내 삶이어야 하고 내 고백이어야 했다.


Theistic Realist

유신론적(有神論的) 실재론자(實在論者)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을 믿으며(유신론) 그 하나님이 어디서든 계시며 나와 함께하시는 것을 믿는다.(실재론)


그 이후 나의 모든 삶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미건조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삶이며

진화론과 자연주의 학문앞에 비소(卑小)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어리석음을 보게 되었다.

창조론을 이야기할 때 자신없어하던 나약한 모습이 아닌 확신과 정직함에 있다.

물론 지식이 깊지 못해서 표현이 서툴긴 해도 나는 성경적 세계관이 더 이상 부끄럽거나 민망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이 되는 내 자신을 회개하고 돌아보며 하나님을 향한 열망과 믿음을 꺼낸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살아계시고 지금도 함께하신다.


TR.H.Lee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니라

(창 41:45, 개역한글)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다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단 4:37, 개역한글)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찌니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자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니라 하였더라 (단 6:26~27, 개역한글)


주 야훼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사 50:4, 개역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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