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죄는 이미 배경을 통해 살펴보았다. 그들의 죄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의 나라를 들어 이스라엘과 유다를 징계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다.(왕상 12:28-29, 출 32:3-4, 신 9:16) 성읍 곳곳에 산당을 만들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그들이 보기 좋을 대로 신을 만들고 섬겼다.(왕상 12:30, 신 12:13-14) 이방의 풍습대로 음란한 행위를 거리낌 없이 하며 장자를 불에 태워 화목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왕하 16:3;17:17;21:6, 왕하 9:22, 신 12:31) 우상을 새겨 만들어서 그것을 섬기며,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섬기고,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점을 쳐서 그 소리에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여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향해 조롱하기까지 했다.(왕하 21:5, 신 18:14, 왕하 2:23)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그곳에 거주하던 이방 민족들을 내어 쫓으셨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공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이방 민족의 죄악 때문이었다.(신 9:4-5) 쉽게 풀이하면 죄악이 관영하여 그 땅이 그들을 용납하지 못한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자들 때문에 땅이 슬퍼하며, 광야의 초장들은 메마른다’(렘 23:10, 표준새번역)고 경고했고, 하나님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창 3:17-19) 또한 하나님은 무죄한 자의(아벨) 핏소리를 들으셨고(창 4:10), 그 일을 행한 가인이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인데 그 이유는 땅이 그 입을 벌려서 무죄한 자의 피를 받았기 때문이다.(창 4:11) 이처럼 땅은 죄를 용납하지 못한다. 공의가 바로 서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옳게 행하는 자가 이 땅에 없어질 때 하나님의 진노는 속히 다가온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후부터 하나님 배역하기를 쉬지 않았다.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호 2:2-5, 개역한글)
2절의 ‘너의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는 영어성경에서 ‘Contend with your mother’(NASB)로 번역하고 있다. 좀 더 세심하게 본다면 음란을 행한 어머니를 이스라엘로 표현했는데 그 어머니와 음란에 대해 논박(論駁)하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졌다.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이 무서운 말씀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했다. 그래서 죄와 그 모습을 버리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벌겨 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모든 것을 잃게 되고 만다.
생각해보라.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밧단아람으로 들어갔을 때는 혈혈단신(孑孑單身)이었다. 그리고 그가 밧단아람에서 나올 때는 두 명의 아내와 두 명의 첩, 10명의 아들들과 1명의 딸 그리고 종들과 양과 염소 떼를 이루었다. 또한 이스라엘(야곱)과 그의 자손이 이집트에 들어갔을 때 며느리를 제외하고 60명이었고, 다.(창 46:26) 이집트를 나온 지 2년이 지나서 20세 이상의 남자들만 60만3천5백20명이었다.(민 2:1-2, 46)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이으면서 이스라엘은 큰 민족이 되었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부족할 것이 없었다. 그 부족함이 없던 이스라엘이 벌겨 벗겨진다는 것은 죄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죄에서 돌이켜 돌아오지 않으면 아기가 세상에 나왔을 때처럼,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도망치는 것처럼 그들의 모든 것을 제하여버리겠다고 경고하신다. 마치 광야에서 물이 없어 갈한 것처럼 말이다.
광야는 수고를 일삼아도 소용이 없는 땅이다. 길도 없고 물도 없으며 죽음이 잔존하는 곳이다.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소망을 가지는 것도 헛되다. 에스겔서에 나온 이스라엘 지도자를 위한 애가의 내용을 보더라도 광야는 모든 것을 체념하게 만든다. ‘이제는 그 나무가 광야에, 가물고 메마른 땅에 심겨 있다’(겔 19:13, 표준새번역) - 이 말씀을(겔 19:13) 시편 1편 3절, 예레미야 17장 8절과 비교해 보라. -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로루하마’(호 1:6)로 불려진다. 음란한 나라의 백성도 음란하기 때문이다. 이 음란함에 대해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기 아내들이 다른 신들에게 제물을 살라 바친다는 것을 아는 모든 남편들과 그 곳에 서 있던 모든 여인들, 곧 이집트와 이집트에 사는 온 백성의 큰 무리가 예레미야에게 항의하였다. "당신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당신의 말을 듣지 않겠소.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 맹세한 대로 할 것이오. 우리와 우리 조상과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우리도 하늘 여신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고, 그에게 술 제물을 바치겠소. 하늘 여신을 섬길 때에는 우리에게 먹을 양식이 풍족하였고, 우리가 잘 살았으며, 재앙을 만나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는 일을 그치고 그에게 술 제물 바치는 일을 그친 뒤부터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부족하게 되었고, 우리는 전쟁과 기근으로 죽게 되었소." 여인들도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고 그에게 술 제물을 바칠 때에, 우리가 남편들도 모르게 그것을 했겠습니까? 그리고 그 여신의 모습대로 빵을 만들어 바치며 술 제물을 바칠 때에, 우리가 남편들도 모르게 그것을 했겠습니까?"’ (렘 44:15-19, 표준새번역)
예레미야에게 항의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자신들이 이방 여신을 섬길 때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섬기는 것을 중단할 때 부족함이 밀려왔고 전쟁과 기근으로 죽게 되었다고 말을 한다. 성경은 이들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아하스를 생각해보라.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을 더욱 부치길 때 그 나라가 어떻게 되었고, 웃시야와 요담과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섬길 때 그 나라가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하라. 이스라엘 마지막 왕에 대해 성경은 고발하고 있다.(왕하 17:1-6, 7-23)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역시 마찬가지다.(대하 36:11-12) 오히려 선지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의 가르침을 겸손하게 듣지 않았다.(대하 36:12) 이 죄상은 여전히 성경에 남아있다.(대하 36:13-21)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듣는다. 말(言)의 전후사정(前後事情)과 본질을 보지 않는다. 자기에게 좋은 것이면 좋은 것이고 자기에게 나쁜 것이면 그것이 사실이어도 거짓말이 된다. 교회이기 때문에 거룩할 것이라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한 이름이 거하는 교회도 사단의 공격이 있으며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과 세상이 주는 이익 앞에 고민하면서 예배에 참석 한다. 예레미야에게 항의한 사람들은 마치 호세아서에서 고발한 사람들과도 같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호 2:5b, 한글개역) 섬뜩하게도 예레미야에게 항의한 사람들의 주장과 어긋나지 않는다. ‘그 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렘 44:17b, 한글개역)
성경을 보면 볼수록 더욱 더 근심이 되는 것은 지도자들의 죄는 개인의 죄로 끝나지 않는다. 공동체에 퍼지게 되고 사회와 전 영역이 이 죄로 고통을 받는다. 본문에서도 음란한 여인이 음란한 자녀를 낳게 되듯이(호 2:4),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을 때 백성들도 하나님을 버리게 된다.
나는 한국 교회에 소망을 품지만 교회의 지도자들이 권력과 명예와 부(富) 그리고 성(性)적인 타락을 걸을 때 그 지도자의 지도를 받는 교인들 역시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보게 된다. 성경은 그 부분을 고발하고 있다. 이것을 바로 잡지 않으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하신 것처럼 한국교회와 한국을 향하여 ‘로루하마’라고 하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에게는 더 높은 윤리와 강령을 요구해야 한다. 지도자는 더 높은 윤리와 강령 앞에 스스로를 삼가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
‘인간적인 지도자’, ‘거리감이 없는 지도자’ 얼마나 우리를 비웃게 만드는 단어인가. 교회는 이 단어 앞에 지도자들이 그 스스로 삼가는 것을 없애버렸다. 마치 막힌 담을 허는 것을 지도자(목회자)와 교인들의 관계를 허물없이 대하는 것으로 해석했다.(엡 2:14, 이 부분에 대해서는 솔로몬 성전과 유대인과 헬라인을 이해해야 한다.) 그 결과 분별력 없는 지도자의 행동에 대해 제동력은 그 힘을 잃게 되었고, 사람들은 은혜와 용서 그리고 성직자라는 단어로 스스로를 올무에 가둔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지만 그 인격적이란 우리의 편리함대로 스스럼없이 대하고 허물없이 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치 성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인간적인 방법과 논리로 풀어내어 하나님의 신성을 허물어 버리고 하나님의 인성을 잘못 이해하는 것처럼 교회는 지금 심각한 위기에 놓여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중간은 없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둘을 놓고 저울질을 해서는 안 된다. 지도자가 거룩하게 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죄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죄를 범하게 된다. 예수님이 죄인의 모습으로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죄에 거하지 않으셨다. 죄를 단호히 거부하셨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이셨다.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갈찌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찌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호 2:6-7, 한글개역)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고, 죄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이 없다고 고개를 흔드는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노력이 헛되게 하신다.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이 의미는 그들이 예전에는 쉽게 산당이나 집에서 우상을 섬기고 신에게 분향 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꺽으시겠다는 것이다. 무엇을 뜻할까? 포로로 잡혀가게 되면 이제 그마저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실제로 이스라엘과 유다가 포로로 잡혀간 후에 예루살렘에는 힘없고 연약한 사람들만 남는다. 모든 것이 폐허가 되어 소망도 없는 공황상태에 그들이 섬겼던 신들을 찾을 힘조차 버겁게 느끼게 된다. 느헤미야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 세세히 적고 있다.
‘나의 형제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유다에서 왔기에, 이리로 사로잡혀 오지 않고, 그 곳에 남아 있는 유다 사람들은 어떠한지, 예루살렘의 형편은 어떠한지를 물어 보았다. 그들이 나에게 대답하였다. "사로잡혀 오지 않고 그 지방에 남은 사람들은, 거기에서 고생이 아주 심합니다. 업신여김을 받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다 불에 탔습니다."’ (느 1:2-3, 표준새번역)
하나님은 이 일을 행하실 때 이스라엘을 이 땅에 없이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다. 호세아서 배경을 통해 보았을 때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은 언약이며, 변개치 않는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해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것은 그분의 거룩함이 죄악을 긍휼히 여기지 못하는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은 그들이 죄를 토설하고 그 지은 죄를 다 씻어내기까지 기다리신다. 그리하여 그들을 그분의 백성으로 다시 부르시며 돌아오게 하신다.
6-7절은 죄의 무덤에서 스스로 나올 수 없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죄를 향하여 더 이상 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하나님이 죄를 막지 않으시면 이스라엘은 죄의 수렁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죄를 막고 그들을 죄가 사해지도록 기다림이 끝날 때 마침내 이스라엘은 “이제는 발길을 돌려서 나의 남편에게로 돌아가야지. 나의 형편이 지금보다 그 때가 더 좋았다”라고(호 2:7, 표준새번역) 고백 하게 된다. 비록 이 말씀이 미래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지만 선지자의 외침을 듣는 깨어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절망이 아닌 소망으로 다가올 것이다. 미래에 말씀을 대하는 나와 우리에게도 징계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항상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오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놓지 않으시면 인간은 절대로 그 길을 찾아갈 수 없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죄와 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인이 된 인간은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존전에 설 수도 없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통해 그 길을 열어놓으신 것이다. 그러나 그 길에 찾아가기 위해서 먼저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 죄를 토설하고 하나님께 나와야 한다.
이방 신을 섬길 때가 더 좋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이(렘 44:17b), 이제는 하나님을 섬길 때가 더 좋았다는 고백을 한다.(호 2:7) 죄는 소망을 꺾지만 하나님은 그 소망을 다시 살리신다. 그리고 죄가 소망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죄의 길을 막고 계신다. 이것을 믿는다면 살아있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아멘으로 화답한다면 교회를 향한 사단의 공격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시기 때문에 변개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소망을 두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겸손으로 하나님께 겸비하여 그의 열심을 사모하고 기다려야 한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그러므로 그 시절에 내가 내 곡식을 도로 찾으며 그 시기에 내가 내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며 또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연애하는 자의 눈앞에 드러내리니 저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저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연애하는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로 먹게 하리라 저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호 2:7-13, 한글개역)
이제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이유를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각종 곡식과 보화를 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새겨 만든 우상에 은과 금을 입히고(8절) 그것들을 섬겼다. 이에 하나님은 소출의 시기에 그 소출을 가져가시고, 이스라엘이 섬겼던 우상과 신들의 모양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신다. 그들이 세우고 멋대로 행하는 명절과 절기를 모두 폐하고, 그들의 밭과 농작물은 폐허가 되게 하며 그 열매를 들짐승들에게 주신다. 왜냐하면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그들에게 감사의 생활이 없었다. 감사를 드리는 것은 단지 입술의 고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감사는 어떤 행위에 대한 내 행동의 답이다.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었다면 공치사(功致辭)하여 조그만 선물을 보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 선물이 과할 때 로비가 되고 뇌물이 된다. - 하물며 하나님이 복을 주셨는데도 우리는 말로만 감사하고 오히려 헌금은 성경시대의 옛 관습이라면서 무시를 한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그 물질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감사가 있는 사람은 감사의 대상에게 좋은 것으로 접대하기를 노력한다. 도움을 받을 때 도움의 손길에 감사하는 사람은 더 열심히 살게 되고 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다른 신에게 감사를 했다.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신이고, 그들의 편함대로 만든 신이며, 그들의 생각과 논리로 그들의 보기 좋은 신이었다. 움직이지도 않고 쓸모도 없는 신을 위해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은과 금을 입혀서 화려하게 만들었으며 심지어는 자신들의 자식들을 제물로 바치기까지 했다. 은혜의 빚진 자는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만 은혜를 도적질 한 자는 그 은혜의 혜택만 누리려고 하는 것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다.(마 18:23-35,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중심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바알을 섬긴 햇수만큼 그들에게 벌을 내리기로 작정하셨다. 이 결정에 대해 사람은 변호할 수 없으며 항소할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무리 중한 범죄인이라 할지라도 변호사의 능력에 따라 감형 받거나 집행유예 또는 무죄(혐의 없음)로 방면될 수 있고, 검사의 능력에 따라 3개월 징역이 무기징역까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평하시고 논리와 지식에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그 분의 저울은 모든 죄를 공평의 추에 재어서 그 죄를 밝히시고 엄중히 결정하신다. 그분이 아직 우리에게 소망을 주실 때 우리가 그 분을 섬기지 않으면 우리는 그 심판에서 영영히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의 작정을 나와 우리 그리고 교회가 가벼이 대한다면 그것도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죄가 될 것이다.
이제 하나님 앞에 놓여진 죄상(罪狀)과 진노 앞에 우리는 돌이켜 근신하고 죄를 토설하며 그분께로 돌아와야 한다. 비천한 자나 존귀한 자나, 가난한 자나 부한 자 모두(이 세상의 모든 사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동일하게 적용 받는다. 만일 지금의 위치와 부 그리고 명성이 주는 유익에 집중한다면 이스라엘이 범죄 한 것처럼 바알을 섬기게 되고 음란한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또한 비천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이 크다고 보는 것도 바알을 섬기는 것이고 음란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나는 죄를 정직히 바라보아야한다. 죄를 숨기지 말아야 한다. 죄를 죄로 봐야 한다. 죄가 주는 유익을 고민하지 말아야 한다. 죄가 나를 삼켜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바알의 자녀로 만드는 것에 도망쳐야 한다.(롬 16:19b, 선한 데는 지혜롭고 악한 데는 미련 하라) 무서운 것은 예레미야 선지자와 에스겔 선지자도 이 죄상에 대해 고발하고 있는데 이는 믿는 자를 향한 고발이다. - 예레미야 23장(특히 11절), 에스겔 8장과 22장을 읽어보라 -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고발이다.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섬기면서 세상의 더러움에 내 자신을 던지는 모습을 하나님은 보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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