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양식/Living Life (경건의 시간)

[SENA] 10월13일(목) 빛나는 보석

TR.H.Lee 2016. 10. 13. 12:18


             

             로마서 16장 1-16절 / 나의 동역자들에게


[묵상]



한국에는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다. 경제화가 시작되면서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가 정착하면서 생겨난 말이다. 고향에서는 가족과 친척이 한 동네 또는 가까운 동네에 인접해서 살고 있어서 어려운일을 서로 돌아보고 부탁하고 함께 했었지만 경제화로 인해 도시로 오고 나서는 먼 고향 친척보다는 가까이 살고 있는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이웃이 친척과 가족처럼 허물을 덮어주고 어려움을 돌아보아 준다는 말에서 유래가 되었다.


1. 한 사람을 추천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요 우리의 자매인 뵈뵈를 여러분에게 추천합니다.'(롬 16:1, 새번역)

바울은 여자인 뵈뵈를 추천한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별로 감흥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3절 이하를 읽다보면 바울이 추천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문안을 전하라는 사람들 중 바울과 어려움을 함께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헌신되고 충성된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바울은 뵈뵈를 추천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에서 열거한다.

- 교회의 일군 (1절)

- 바울과 많은 사람을 돕는 자(2절) - great help to many people(NIV), 개역개정에서는 '보호자'로 표현하고 있다.


당시 시대상을 본다면 여성은 남성(아버지, 남편)의 소유였다. 작금에서야 여성의 인권에 대해 동등하게 여기고 있지만 중동의 사회 시대상으로 본다면 여성이 나서서 일을 한다는 것은 여성이 과부가 되었거나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을 정도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여성의 지위는 그리 높지 못했다. 그런 사회적인 배경에서 바울이 여성인 뵈뵈를 추천하고 있다. - 여성 뿐만 아니라 성인이 아닌 어린이를 포함한 미성인도 마찬가지였다 - 여기서 바울의 심지가 얼마나 깊은 사람인가를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요셉의 아들'로 불리기도 하셨지만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마리아의 아들'로 불리고 있다. 속된 말로 한다면 '애비 없는 자식'이다. 시대상황에 비추어 보자면 마리아는 그의 남편이 될 요셉과 다수의 증인들 앞에서 돌에 맞아 죽어야 했다. 강간(통) 죄는 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었고 하나님이 율법으로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간(통)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강간을 한 남녀 모두가 있어야 한다. 각설 - 하지만 마리아의 정혼자인 요셉은 마리아가 태중에 아기가 있는 것을 알고 가만히 정혼을 끊고자 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어서 이 일로 인해 마리아가 큰 일 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요셉은 꿈에 주의 사자의 지시를 받아 마리아의 보호자가 된다.(마 1:18-25)


환경은 물론이고 사람들이 보는 정통성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은 가장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 특히 사역 도중 여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분은 창녀였던 마리아의 향유 옥합을 기쁘게 받으셨다. 열두 해 혈루증 - 이 병은 공동체에서 버림받는 병 중 하나임- 을 앓고 있는 여인을 고쳐주셨고, 사마리아 여인의 물을 청하셔서 그녀를 아픔에서 구원하셨으며 사역이 시작하기도 전에 그는 어머니인 마리아의 청을 듣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 예수님께서 당시 사회적인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분의 십자가의 의미를 안다면 페미니즘의 사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십자가는 개선이 아니라 회복을 뜻한다 -


이런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사도 바울의 헌신이 열린마음이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 사역 전 까지 그는 변화되었다 - 바울은 히브리인중의 히브린이고, 유대인으로서는 율법의 열심이 있었다. 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났고 베냐민 가문의 출신이며 가말리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율법주의자였다. 그는 여성을 바라보는 편력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자매 뵈뵈를 추천을 한다. 단지 자기를 도와서가 아니라 그녀가 하나님앞에 어떻게 헌신하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돕고 있는지를 보았다. 바울은 그녀가 로마교회에 필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많은 동역자들, 그리스도께 헌신된 사람들이 많음에도 그녀를 먼저 떠올리는 것은 확고한 바울의 마음이 섰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사람들의 환심은 중요하지가 않았다.


이 땅에서 살다보면 많은 실망과 좌절을 느끼게 된다. 분명 사회적으로 잘못되었는데도 법원은 무죄판결을 내린다. 분명 죄의 대가를 받아야 하는데도 정부는 특사로 풀어준다. 분명 적임자가 있는데도 누구의 입김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본다. 사람을 죽였어도 변호사의 변호능력에 따라 징역형이 집행유예가 되기도 하고 증거를 반박하여 혐의없음(실질적으로 '무죄')으로 판결을 받아낸다. 이것은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 나는 교회를 감싸고 보호하겠지만 잘못에 대해서는 두둔하고 싶지 않다 - 대형 교회일수록 내면의 신앙과 중심과 헌신을 보기보다는 재력과 공동체에 유리한 영향력을 본다. 바울에게 그런 사람들이 없었을까? 사람 사는 곳에서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바울은 물질에 대해서 모본(模本)을 보였다.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나는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내 손으로 일해서 마련했습니다. 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다. 이렇게 힘써 일해서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 행 20:33-35a,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한 마지막 설교를 읽어보라(사도행전 20장 -


비단 이런 일이 다른 사람에게만 돌릴 문제일까? QT는 나를 위한 시간이다. 내가 하나님께 배우는 시간이다. 나에게는 문제가 없는 것일까? 생각 해보자면 누워서 침뱉는 겪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환심을 보이고 나를 적대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적대하는 모습이야 말로 사람을 겉으로 판단하고 사람을 신분으로 나누는 모습과 다를게 뭐란 말인가? 이런 내가 사람을 천거해야 한다면 분명 나에게 환심을 샀던 사람들만 생각할 것이다. 내 중심은 전혀 변하지 않고 있었다. 내 마음을 보여주는 친분의 유지는 선을 그어야겠지만 사람을 바라볼 때 겉으로 나타난 것과 나에게 대한 태도로만 본다면 나는 자격상실일 것이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을 향해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얼마나 많이 다투고 옹졸했는지를 본다면 말이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시고 나를 다듬고 계셨다 -


2. 문안을 요청한 사람들

바울은 자기와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 문안을 전할 것을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당부하고 있다.

- 브리스가와 아굴라 :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바울의 목숨을 구함

- (브리스가와 아굴라)그들의 집에 모이는 교회

-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 : 아시아에서 그리스도를 믿은 첫 열매

- 마리아 : 로마교회를 위해 수고를 많이 함

-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 바울의 친척이며 바울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믿음, 사도들에게 좋은 평을 받음

- 주 안에서 나의 사랑하는 암블리아

- 그리스도 안에서 동역자인 우르바노

-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

-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을 받는 아벨레

- 아리스도불로의 가족

- 나의 친척인 헤로디온

- 주님 안에 있는 나깃수의 가족

- 주님 안에서 수고한 드루나배 드루보사

- 주님 안에서 수고를 많이 한 사랑하는 버시

- 주님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루포그의 어머니(바울의 어머니이기도 함)

- 아순그리도, 블레곤, 허메, 바드로바, 허마와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 자매들

-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네레오그의 자매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


위에서 문안을 요청했던 사람들은 로마교회에 있는 사람들이다. 로마교회에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있는지를 보게된다. - 이것은 로마교회가 얼마나 헌신이 가득했는지 볼 수 있다. 교회를 평가할 때 사람의 숫자로 평가하지 않았음을 주의하라 - 특별히 바울이 묘사한 단어를 잘 살펴보는 것은 많은 의미를 준다. '내 목숨을 구해준', '나의 사랑하는', '첫 열매',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믿은'. '주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을 받은', '주님 안에서 수고를 많이 한', '택하심을 받은' 이러한 표현은 바울의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표현이다. 바울은 그들을 간절히 보고 싶어 한다. 그 이유는 한결 같다.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되고 헌신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들을 생각할 때에 자신의 사역이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을 것이고 자신에게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았을 것이다.


그것과 반대로 나의 열매는 무엇일까? 사도바울을 보면서 사역자를 목회자로 규정짓는 것이 핑계라는 것을 발견한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헌신된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정말 그리스도의 말씀에 헌신이 되어야 한다면 지금처럼 살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런데도 쉽지가 않다.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기도]



하나님 바울의 천거와 문안을 요청하는 것을 봅니다. 귀한 하나님의 말씀에 감사를 드립니다. 사람을 바라볼 때 내면과 되어질 모습을 보는 안목이 내게는 부족합니다. 저를 보고 계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밀어내는 나를 지금까지 앞으로도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볼 때에 한 사람을 추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고 뼈를 깎는 일인지를 깨닫습니다. 내 마음이 환심을 바라지 않게 하시고 내면의 중심을 보게 해주세요. 사람은 사람의 외모에 반하지만 하나님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사람을 일으켜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구원자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내 열매가 없는 것이 부끄럽고 창피합니다. 이것은 제가 한 그동안의 모든 것이 얼마나 헛되고 헛되었는지 봅니다.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나도 열매를 위해 내가 어떻게 헌신을 해야 하고 마음을 잡아야 하는지를 조금씩 느껴갑니다. 늦깍이이지만 주님의 말씀에 헌신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저를 인도해주십시오. 하나님 사랑합니다.